십 년이 지나도록 오래 뇌리에 박힌 말
생애 처음 뮤지컬을 보러 갔다. 박효신과 옥주현이 나오는 '엘리자벳'이라는 뮤지컬이었다. 강당 안 곳곳엔 공연 포스터들이 걸려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들뜬 표정인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나도 뭔가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를 그곳에 데려간 것은 그때의 나의 오너, 남대문 액세서리 사장님 이였다. 스물일곱 살까지 난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전시회나 뮤지컬, 콘서트 같은 문화생활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사장님께서 놀라 그곳에 날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사장님과 나도 그곳에 온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공연장에 들어가 티켓에 적힌 숫자를 찾아 의자에 앉았다. 내 좌석은 무대와 꽤 가까운 자리였다. 난 속으로 좌석과 무대가 가까우면 티켓값이 꽤 비쌀 거라는 생각과 사장님이 비싼 공연의 티켓대신 돈으로 보너스를 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못난 생각을 했다.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고,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4d 영화보다 조금 더 재미있을 거라는 내 상상력을 완전히 부셨기 때문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유명한 배우들이 살아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고 날고뛰었다. 그들의 땀방울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고 걷친 숨소리마저 코앞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묘한 경험이었다.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그들이 웃으면 같이 웃었고, 울면 같이 울었다. 그렇게 난 두 시간 동안 난 공연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연의 중간쯤에 새하얗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옥주현이 무대 중앙의 높은 계단에 올라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노래를 불렀을 땐 나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타고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올라간 뒤 배우들이 다시 나와 인사를 했다. 난 사장님을 따라 불러본 적도 없는 휘파람을 부르며 손바닥이 아플 만큼 박수를 쳤고, 박수를 치면서 다시 이 공연장에 관객으로 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사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혜야, 그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모르는 건 이상한 거야. 네가 지금은 어리니깐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는 거지,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이런 흔한 경험 하나 안 했다고 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앞으로 세상은 모르면 더 바보가 되는 세상이야, 너도 이제 시간을 내서라도 뮤지컬도 보러 다니고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가고 문화생활 좀 하고 그래. 책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경험으로도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아. 네가 직접 느껴보고 경험해 봐야 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세상이야. 알겠지?"
그렇게 처음의 뮤지컬을 시작으로 사장님은 날 여기저기로 참 많이도 데려다 놓았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부터 미술 전시회장, 이태원의 핫플레이스 거리등 이곳저곳을 누비게 하였다. 어느새 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기하학적으로 커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어느 정도 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비싼 돈을 주고 마우스 경쟁에서 이겨 좋은 좌석의 뮤지컬을 보러 다녔고, 각종 전시회도 매달 한 번씩은 꼭 보러 다녔다. 해외여행도 그 해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세부에 다녀왔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세상이라는 사장님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땐 사장님의 말이 별로 와닿지가 않았었다. 사장님의 말투에서 나에 대한 답답함이 느껴졌기에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나는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러나 이 말은 십 년이 지나도록 오래 기간 내 뇌리에 박혔고, 경험을 통한 배움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처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였다.
아마도 사장님은 시종일관 여기가 어딘지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이유도 모른 채 좋은지 싫은지 알 수 없는 표정인 나를 보며 내내 불안하셨을 것이다. 이제와 말하기에는 늦었지만 난 그 모든 곳이 좋았다. 부모도, 친구도, 형제도, 그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경험들을 할 수 있게 해 준 분이라는 점에서 감사하다.
사장님은 내가 중국어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자 날 중국어 학원에도 보내셨다. 끽해야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직원을 사장님은 참 애지중지 키우셨다. 나라면 5년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마음을 다해 사람이 사람을 부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내 가게를 창업하고 나서 직원을 구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에서 일을 했을 때에도 내 밑에 다른 직원이 들어왔을 때가 난 제일 힘들었다. 일을 가르치는 건 괜찮았는데 마음을 주면 떠나버리고 그렇다고 마음을 주지 않으면 닥쳐오는 많은 상황들이 너무 불편했다. 5년이란 년수가 찼는데도 사수역할도 중간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으니 사장님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때는 서운했던 모든 일들이 지금 와서는 다 내 잘못으로 인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상황에 다른 선택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어리숙한 나는 그러질 못했다.
엘리자벳 뮤지컬 中
'나는 나만의 것' 가사
난 싫어 이런 삶
새장 속의 새처럼
난 싫어 이런 삶
인형 같은 내 모습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내 주인은 나야
난 원해 아찔한 외줄 위를 걷기를
눈부신 들판을 말 타고 달리기를
난 상관없어 위험해도
그건 내 몫이야
그래 알아 당신들 세상에선
난 어울리지 않겠지
하지만 이런 날 가둬두지 마
내 주인은 바로 나야
저 하늘 저 별을 향해서 가고 싶어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갈래
난 나를 지켜나갈 거야
난 자유를 원해
난 싫어 그 어떤 강요도 의무들도
날 이젠 그냥 둬 낯선 시선들 속에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아
난 자유를 원해
당신들의 끝없는 강요 속에
내 몸이 묶인다 해도
내 영혼 속 날갠 꺾이지 않아
내 삶은 내가 선택해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난 이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주인은 나야
난 자유를 원해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