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
새벽공기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달큼한 냄새를 맡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남대문 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렸었는데 운이 좋으면 앉아서 갈 수도 있었다. 내가 출근을 했을 당시 남대문 액세서리 상가들은 거의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이 시간을 1분이라도 넘기면 만원이라는 벌금을 내야 했다. 그때의 만원은 나에게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큰 금액이었고, 매일 아침 나는 늦지 않기 위해 도착역인 서울역에서 내려 남대문 까지 전속력으로 뛰었다. 물론 집에서 5분이나 10분, 일찍 나왔더라면 그렇게 뛸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게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그렇게 나의 달리기 실력은 날마다
*일취월장으로 늘었고, 걸어서 10분인 그 길을 단 3분 만에 뛰어서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매장에 전속력으로 달려 도착한 후에는 비에 젖은 생쥐꼴에서 사람으로 변신을 시작했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고데기로 말고 *옷맵시를 단정히 했다. 직업 특성상 액세서리를 직접 하고서 판매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침의 치장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다음 정신을 차리고 에스칼레이터 옆에 있는 하얀색 공용 전화기(매점 직통전화)로 얼박(얼음박카스)을 시킨다. 얼박을 먹으면서 전날 있었던 주문량, 납입기한 등을 체크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 될 순으로 정리를 했다. 워낙에 일이 밀려있었기에 정리라는 것에 대한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남대문에서 내가 했던 일을 나열하자면 거의 모든 것이었다. 손님응대부터 상품소개, 판매, 주문서 작성, 납입기한정하기, 결제, 부업집에 물건주문하기, 부자재 상가에서 재료 사 오기, 정산, 배달, 청소, 디피 바꾸기 등 많은 일을 했다.
먼저, 손님이 오면 베스트 상품과 신상 상품을 소개했다. 상품을 고르는 기준은 손님마다 너무 달라서 우선 가짓수가 많아야 했다. 그래야 판매할 상품도, 고를 수 있는 폭도 넓어졌기 때문이다. (가끔, 구석에 있는 나온 지 1년이 넘은 상품들이 눈에 띄어 주문서에 얻어걸리곤 했다.)
그렇게 주문서를 작성하고, 상품을 보내고 받는 납입기한을 손님과 같이 정했다. 만약 이때 보내야 할 상품 수량이 모자라는 경우에는 납입기한까지 부족한 수량이라도 먼저 보내고 나머지 수량에 대한 금액을 환불해 주거나 다른 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결제는 외국 거래처일 경우엔 거의 *선불로 받았고, 상품을 보낸 후 퀵아저씨들을 통해 *후불로 받을 때도 있었다. 한국 거래처는 주로 월에 몰아서 월 결제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매나 도매, 처음거래가 트는 곳은 무조건 선불이었다.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거래처에 먼저 상품을 보냈다가 결제를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상품 가격은 사실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라는 특성상 종종 가벼이 무시되기 일쑤였다. 대쪽같이 뜻을 굽히지 않으면 손님에게도 대쪽같이 차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할인은 필요했다. 손님들은 흥정의 왕으로 사장님들의 마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고, 적게는 백 원 단위로, 많게는 주문수량에 따라서 천 원 단위로 단가를 깎아 주기도 했다.
일명 장끼(영수증)에는 기본으로 판매자의 상호명과 호수, 위치, 핸드폰번호 등이 기재되어 있고, 구매 시 구매자의 상품 목록과 수량, 단가, 총 결제해야 할 금액 등이 적혔다. 그것을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나누어 가지며 보관했고, 판매의 기싸움과 눈싸움, 모든 싸움들을 끝내면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매일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만났다. 코로나19가 터지기 훨씬 전이라 일본, 중국, 아랍, 베트남,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 많이도 만났다. 히잡을 두르고 나타났던 가족단위의 아랍손님,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흥정의 대가인 일본손님, 웃는 얼굴을 했는데도 시비를 거는 듯한 크고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단골중국손님, 반짝거리는 까만 피부를 가진 잘생긴 아프리카손님까지 참 많은 인연들이 나를 스쳐갔다. 그렇게 작은 지구본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 속에 매일매일이 아주 빠르고 즐겁게 흘러갔고, 나는 20대 후반, 돈주고도 못 살 귀중한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동료를 만나러 오랜만에 남대문으로 갔다. 백색, 주황 등의 불빛과 색색의 유리알을 낚싯줄로 칭칭 감아놓은 머리띠, 화려한 패턴으로 된 리본핀 등이 보였고, 귀로는 일본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예전 남대문에서 맡았던 익숙한 각종 본드냄새가 코로 들어왔고 나는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다. 이곳이 현재 진행형인 아닌 과거의 나의 일터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직도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들, 아마도 나는 그 시절이 그리운 것 같다.]
*일취월장
나날이 다달이 자라거나 발전함.
*옷맵시
차려입은 옷이 어울리는 모양새.
*선불
일이 끝나기 전이나 물건을 받기 전에 미리 돈을 치름.
*후불
물건을 먼저 받거나 일을 모두 마친 뒤에 돈을 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