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치오르는 날에......
조각난 기분
- 김 중 근
뎅그머니 홀로 빈집에 앉아 우울한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혼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공허(空虛)함이 있다.
그는 주머니가 비어있어도 늘 큰 목소리로 호탕하게 주위를 압도한다. 목소리가 일단 크다.그동안 가식없는 웃음 끝에 나오는 동글동글 부드로움을 갖춘 당신인 줄 알았다. 그 웃음으로 복잡다난(複雜多難)했던 세상 일도 잊게 할 사람인 줄 알았다. 그는 앞코가 뭉퉁한 고무 슬리퍼를 가끔 신고 다닌다. 갈기갈기 찢겨서 조각난 마음과 허탈한 삶 속에서도 그는 그래도 아름다운 보석같은 삶이 숨어있기 마련이라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던 그다. 하늘 나라의 삶같이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영낙없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별하나 머리 위에 달고 반짝이듯 항상 싱싱하게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내 멘토로서 머리 위에 피고지는 산중 오솔길의 샛별같이, 인생 항로의 안내자가 되어 삶의 싱싱함을 발견케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늘 각자 하나, 둘 주고받으면서, 홀로 밝게 떠있는 해와 달같이 환한 마음을 갖게했었다. 우리 가슴 한 자락에 사랑 하나 심어놓으면 구린내 나는 흙 두엄의 냄새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점 하나 풀잎 하나 그려놓으면 푸른 초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그가 곁에 있으면 초롱초롱한 가을 밤 하늘의 별 빛을 맑은 물에 채워 세수하게 되고, 한 여름 거른 땡볕 틈에서 시름시름 죽어간 그믐 달빛도 눈물 흘리며 돌아보게 될 정도로. 그를 좋아했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아울러 늘 꽃처럼 살고 싶어하는 누구의 소망처럼, 우리도 작은 들 꽃이 되어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아름답게 피고싶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가랑잎이 허무히 떨어져 내리는 창밖을 보다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20여년 가까이 내가 존경하고 마음을 주었던 이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 실망감은 슬픔을 넘어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인가? 라는 허무(虛無)함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그의 발길을 끊으면서 끊어진 이후에 밀려오는 분노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언제든지 그 사람과의 관계는 활활 타오르리라고 믿었었는데... 강렬한 불길이 잡(啑)스러운 이유로 숨죽이며 사그러진데 대한 허망(虛妄)함이 들면서 아무것도 영원하지 못함을 느끼게 된다.
비록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이 떠날 수 밖에 없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말 한 마디라도 “미안했다”라고 변명아닌 변명이라도 듣길 바랬다. 지금 이 순간 까지 어른 대접 받겠다고 대리인을 통해 고개 숙이질 않는다. 마치 바람에 떨어진 낙엽처럼 이 세상 다 못할 달디단 마음만 뺏기고 버려진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청명(淸明)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버림당한 서러움을 달래려 하지만 분노가 차오른다. 진한 감정이 흐르고 흘러서 결국 머리 끝에서 발 끝 까지 돌고 돈다. 그 사람이 주위로 부터 비난 받고 그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 마다, 그 사람을 옹위(擁衛)하고 호위무사(扈衛武士)가 되어 보호를 해주었건만, 나에 대한 험담(險談)을 주위에 내뱉아 내 귀에 까지 되돌아왔다. 그가 또 다시 언젠가 손짓하려는 몸짓과 추파를 내게 멈추질 않겠지만, 밀려오는 슬픔과 허전함은 어쩔수 없다. 내 생활을 억제하면서 내 모든 것을 다하여 진실한 마음을 베풀어 주었건만 돌아온 건 야수(野獸)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인생 거진 1/4을 삭둑 잘리운 채 도륙당한 삶이 우울하다. 고장난 내 시계가 벌써 7시 40분을 가르키고 있으니 요즘 날마다 반복되는 이 기분은 침울하다. 그저 아침 이슬은 자신을 태양 볕에 혹사당할 때 흔적없이 사라지듯이 이 시간 소리없이 흐느낀다. 가슴에 서린 끝없는 인생 무상(無想)은 매일 새로운 슬픔으로 이슬같이 내린다.
나는 지금 우리 안에 갇혀 태고적 원시림을 질주했던 한 마리 야수(野獸)의 모습같이 초조하게 서성인다. 한 마리 야수(野獸)의 모습으로 혼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텅 빈 방에 슬픔과 허망함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야수(野獸)처럼 울지는 않는다. 그러나 홀로 있는 빈 집...괴로움에 찬 포효, 슬픔에 몸짓하는 분노 때문에 증오가 끓어오른다.
그러나 내 머리 위에 올려논 별이 총총할 늦 가을이다. 밤 하늘의 가을 국화(菊花) 다발 속에서 밤을 열어 그리움 물들이듯 그 사람에 대한 애증을 떨치기 어렵다. 오늘 밤, 밤 하늘에 피어난 그 들국화 한 잎 따다 찻잔에 띄워 그것을 한 모금씩 목젖으로 씻어내겠다.
- 2024년 11월 22일
분노가 치오르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