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땋은 머리

by 꿈치 Dec 31. 2024

할머니께서는 매일 아침 나의 머리를 곱게 땋아주셨다.

다른 아이들은 양갈래로 땋거나, 발랄하게 높이 묶어 땋거나,

하나로 묶고 둘로 나누어 땋는 등 이래 저래 새로운 모습의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줄곧 정가운데에 하나로 묶어 길게 땋은 머리였다.

할머니께서는 늘 같은 자리, 같은 모양으로 땋아주셨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아이들의 예쁘고 다르게 땋은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왠지 내 머리만 조선시대 분위기가 나는 거 같아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할머니께서는 10년도 더 된 하늘색 소파에 앉으셔서

굵은 대왕 빗과 물분무기를 바닥에 가지런히 놓으신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의 가랑이 사이에 앉는다.

할머니께서는 빨간 리본 머리끈을 입에 앙 무시고,

감지도 않은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잔뜩 뿌리시고는

굵은 빗으로 나의 긴 머리를 엉킨 곳 없이 빗으신 다음

가운데로 머리카락들을 모아 하나로 묶으신다.

그리고 한 묶음이었던 머리카락들을 세 갈래로 나누어 한코 한코 땋기 시작하신다.

한코 한코 그렇게 늘어나면 나는 그 길이게 맞추어 고개를 들거나 내려서 당겨주었다.

할머니와 나만의 머리 묶는 쿵짝이었다.


그러다 집중력이 떨어진 내가 중간에 고개를 흔들거나 흐트러지면 이내 꿀밤이 날아오곤 했다.

할머니와 싸운 날이거나, 이내 날아온 꿀밤에 기분이 상할 때면 나는 고개를 더 세게 당기거나

씩씩거리는 등 투닥투닥하는 날도 많았다.

머리가 길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묶는 시간만큼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매일매일 할머니께서 머리를 땋아주시는 시간이

나에게는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루하고 힘든 시간일 뿐이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단발을 할 때, 예쁜 모양으로 파마를 할 때, 예쁜 색으로 염색을 할 때도

내 머리만 365일 검은색에 하나로 길게 땋은 머리였다.


그러던 중 어느 겨울 12월의 끝자락 '천국의 계단'이라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최지우' 언니를 보고 말았다. 언니의 앞머리가 있는 중단발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땋은 머리의 끝에 있는 꼬랑지를 이마 앞에 올려놓고는

앞머리가 있는 것처럼 요리조리 만지작 거리며 따라 해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께 며칠을 조르고 조르고 졸라 드디어 머리 자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마침내 기나긴 할머니의 땋은 머리에서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거울 속 나의 모습은 최지우 언니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원하는 머리로 자르고 묶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한 번만 이라도 헐머니께서 나의 머리를 땋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 번이라도 그 의자 앞에 다시 앉아 따뜻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물분무기의 축축함과 굵은 빗의 고운 빗질,

그리고 한코 한코 땋으시던 그 떨림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10년도 더 된 하늘색 소파에 앉으신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활짝 핀 하늘색 꽃에 앉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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