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투수, 고독한 승부사
야구장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는 운동장을 그라운드라고 부른다고 2화, 야구장 그라운드 편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라운드에는 두 개의 무대가 있다. 그 두 개의 무대는 위 그림에 표시된, 마운드와 타석이다. 마운드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곳이고, 타석은 타자가 공을 치는 곳이다.
타석은, 공격하는 팀의 9명 선수 모두가 타순대로 나와서, 투수가 던지는 공을 상대하게 되는 공격의 무대이다. 다른 수비수들이 수비를 하는 곳들을 뒤로하고, 마운드만을 수비의 무대, 아니 투수의 무대라고 불러주는지, 왜, 투수가 팀의 "에이스"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번 편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투수는 타자를 아웃시키기 위해 공을 던지는 포지션이다. 수비하는 팀에서 공격을 하는 팀에게 공격을 하는 유일한 자다.
야구경기에서는 9명의 선수가 경기를 뛴다. 수비를 할 때에도 수비수는 9명이고, 공격을 할 때에도 타자는 역시 9명이며, 수비에 참가했던 선수와 공격에 참가했던 선수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다. 수비를 할 때에는 류현진 같은 선수 9명을 내 보내고, 공격을 할 때에는 이승엽 같은 선수 9명을 내 보내선 안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다른 스포츠처럼 선수교체를 할 수 있지만(타자를 바꾸면 대타, 주자를 바꾸면 대주자, 야수를 바꾸면 대수비), 그 선수가 공격할 때 교체 되었다면, 그 후 시점부터 수비에 참가해야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수는 타석에서 타자로써 공격에 참가하지 않는다. 투수는 공을 던지는데 체력을 많이 사용하므로, 공을 던지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취지이다. 투수가 빠지면, 8명의 타자만 남게 되기에, 투수 대신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 1명이 더 필요한데, 이를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 DH)라고 한다고 이전 편에서도 설명했었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어서 투수도 타자로서 타석에 들어가는 리그도 있다)
지명타자까지 둘 만큼,
투수는 팀에서 매우 중요한 "에이스"의 포지션이자,
많은 체력과 신체를 사용하는 포지션이다.
또한, 투수라는 포지션이 선수간 기량의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그래서 야구경기를 보러갈 때, "누구랑 누가 붙냐?" 다음 질문은 "선발투수가 누구냐?"일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경기 시작 전부터 투수에게 기대를 거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긴 하지만, 한국 야구를 생각할 때 "철완 최동원", "무등산폭격기 선동열" 투수가 "국민타자 이승엽",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타자보다 팀의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고, 가슴도 조금 더 웅장해지며, 사람들 마음속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되실 것 같다.
프로야구 각 구단에서 매 해 신입 선수를 선발하는 "드래프트"라는 절차를 진행할 때, 정해진 순서대로 구단별로 한 번에 한 명씩 돌아가며, 희망 순위별로 선수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선발하는데, 어느 구단이던 투수가 높은 희망 순위에 포함되는 것도 일반적인 드래프트 전략이다.
즉, 잘 치는 타자와 잘 던지는 투수가 있다면, 잘 던지는 투수를 우선적으로 영입할 확률이 높다.
무대는 모두가 집중하고 기대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대는 그것에 부응하는 기량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이다.
타석이라는 무대는 9명의 타자 모두가 한 번씩 올라와서 타격을 하므로, 그 부담을 나누어지게 되지만, 마운드라는 무대는 1명의 투수 혼자서 9명의 타자를 상대로 공을 던져야 하므로, 관중들 뿐만 아니라, 같은 편 수비수들도 투수의 어깨에 기대를 건다.
경기가 시작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공을 던지고 분위기를 리드하는 투수를 선발투수, 팀을 위기의 상황에서 구원하는 투수를 구원투수, 경기를 무사히 마무리 짓는 투수를 마무리 투수라고 부른다.
선발투수는 매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경기에서 많은 공을 던지게 되니, 하루를 던지고 나면 일정시간 쉬어줘야 다음 경기를 위한 어깨의 건강을 보전할 수가 있다. 그래서, 1선발투수, 2선발투수, 3선발투수 ··· 와 같이, 등판 순서를 정해두어 스케줄에 맞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
1선발 투수가 팀의 간판스타이자 가장 잘 던지는 투수인 경우가 많다.
반면, 1선발타자, 2선발타자라는 것은 없다. 경기를 시작할 때, 오더지에 적히면 그것이 선발타자이고, 잘하는 타자가 한 경기 뛰었다고, 며칠 씩 쉬게 하지는 않는다. 또한, "구원", "마무리"라는 단어를 타자에게는 쓰지도 않는다.
그만큼, 수비에서 점수를 주지 않기 위한 투수의 역할이 막중하다. 물론, 공격을 성공시켜 득점을 하기 위한 타자의 역할도 막중하지만, 타자는 9명이고, 투수는 단 1명이다.
또한, 팀의 승리에 대한 영광도, 팀의 패배에 대한 책임도, 모두 투수의 개인 성적으로 기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투수를 "에이스" 포지션으로 부르고 대우한다.
타자는 한 경기에 적게는 4타석, 많게는 6타석 정도 타석에 올라간다. 주자가 되어도, 축구나 농구처럼 계속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뛰어야 할 때만 뛰되, 대기하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체력소모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투수는 혼자서 모든 공을 던져야 한다. 심지어 그 공들은 매 타자와 승부를 짓는 최선을 다하는 공이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그런 공들을 하루에, 100개가 넘도록 던져야 할 때도 있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들은 하루에 200개가 넘는 공을 밥 먹듯 던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공을 던지면, 손가락이 찢어지기도 하고,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투수는 또 공을 던진다.
실제로, 투수들의 투구동작은 팔 건강을 증진시켜 주는 운동은 아니라고 한다. 어깨와 팔꿈치의 관리방법, 연습방법, 그리고 타고난 재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평생 던질 수 있는 공의 숫자는 대략 정해져 있다고 한다. 공을 많이 던질수록, 팔꿈치와 어깨 인대나 뼈는 점점 더 손상이 되어 가고, 공을 휴식 없이 던질수록, 그 손상의 속도는 가속화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투수들은 잦은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토미존 수술 등이 투수들이 받는 대표적인 수술이다.
사람들 가슴속에 오래 남는 위대한 투수들의 공통점은, 본인의 팔이 손상되어 수술이나 장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임을 알고서도, 자신의 팔꿈치를 희생하여 팀의 승리나 우승과 기꺼이 맞바꿨던 선수들이다. 다른 포지션과 달리 살신성인의 감동이 있기에, 투수가 타자들보다 사람들 가슴속에 더 오래 남는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래의 두 사진은, 자신의 팔꿈치를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기꺼이 바꾸었던, 내가 좋아하는 위대한 두 명의 투수들이다.
<토막설명1 - 토미존 수술>
토미존 수술(Tommy John Surgery)은 팔꿈치 인대재건술(Ulnar Collateral Ligament Reconstruction, UCL 재건술)의 일종으로, 주로 야구 투수와 같은 팔을 많이 사용하는 선수들이 팔꿈치 부상 후 받는 수술이다.
이 수술을 처음 받은 선수의 이름이 토미 존(Tommy John)이라 수술 이름도 토미존이라 부르고 있다. 팔꿈치 인대손상으로 인한 팔꿈치의 안정성을 회복시켜, 선수가 다시 정상적인 운동이나 활동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그 목적이다.
특히 투수에게는 팔꿈치가 회전할 때, 매우 큰 힘이 가해지기 때문에 이 수술은 그들의 커리어 연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토미존 수술 후 완전히 회복하여 경기에 복귀하려면 보통 12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스타급 투수들은 대부분 이 수술을 받았다.
타자들이 방망이로 투수가 던진 공을 칠 때에는, 원하는 방향과 위치로 안타를 치거나, 방망이를 크게 휘둘러 공을 담장너머로 보내 홈런을 치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타격 목표이다.
그러나, 투수의 경우 단순히 원하는 방향과 위치로 공을 던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던지고자 하는 그 위치를 향해,
어떤 경로로 던질 것인지,
어떤 회전수로 던질 것인지,
어떤 속도로 던질 것인지,
어떤 팔높이에서 던질 것인지,
얼마나 빠른 템포로 던질 것인지,
얼마나 역동적인 동작으로 던질 것인지,
얼마나 앞으로 발을 뻗어 던질 것인지
그 위치로 내가 설계한 대로 정확히 던질 수는 있는지 등
구질과 선수의 특징이 사람의 성격과 같이 투수마다 다양하고, 그만큼 같은 포지션 내에서 선수간 기량의 수준차이도 다른 포지션들에 비해 클 것이라 감히 예상한다.
볼인줄 알았는데 스트라이크가 된다던가, 위협적인 몸쪽으로 가까이 오는 공을 잘 던진다던가, 갑자기 적응하지 못한 강속구가 날아온다던가, 공의 회전수가 높아서, 공을 치더라도 제대로 날아가지 않는 등 투수의 기술적 기량이 좋아야, 타자가 공을 치기가 어려워하고, 그 기량의 차이는 투수마다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심리적 압박감이 강한 위기상황을 이겨낼 정신력도, 실망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중심을 다잡고 다시 집중하여 경기에 임하는 회복력도, 동료 수비수들의 희망이 되고,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결속력도 필요한 것이 투수이다. 우수한 기술적 기량, 강한 심리적 기량을 함께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이 강한 투수를 우리는 "에이스"라고 부른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하고, 모두의 원망을 한 몸에 받기도 하며, 기대의 공이던 원망의 공이던, 혼자서 던지기에, 마운드에 서는 자, 투수는 고독하고 외로운 법인 것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더 큰 기백을 가져야 상대를 이겨낼 수 있는 무대이기에, 외골수적인 면모를 가진 선수들이 종종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고독하고 외로운 승부에서 이겨낼 수 있는 투수가 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야구선수들 중에서 슈퍼스타는 투수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투수는 자기가 난조를 보여 마운드에서 내려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내려와서는 안된다. 자기가 고개를 숙이면, 자기 뒤에 있는 야수들이 다 고개를 숙이는 꼴이다. 그건 투수로서의 자존심이다.
by (故) 최동원 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