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도, 건물 한 채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길 한가운데
그래도 포장은 되어 있어 걷기는 편한 그 길에
말끔한 그림자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문득 누런 바람 알갱이가 세차게 불어온다.
떠밀려온 시큰둥한 구름이 태양을 목 조른다.
서늘한 기분에 괜스레 옷깃을 들춘다.
그는 혼자 서 있다.
나는 혼자 걷고 있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하얀 머리의 사람들
갑자기 뛰어온 긴 머리의 사람들.
한참을 앞서가야 했을 터인데 왜 돌아왔을까.
함께 걷기를 좋아할 터인데 굳이 왜 왔을까.
그들이 나의 말끔한 옷을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를
의미 없이 걷어찬 돌부리들을 말하며 밝게 웃는다.
나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흐리게 웃는다.
난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혼자 걷고 있다.
그는 그저 걸을 뿐이다.
마침내 풀려난 태양이 가쁜 숨을 토해낸다.
그의 앞으로, 그리고 뒤에서 걷는 그림자들에 가닿는다.
그가 이따금 멈춰 서서 두리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