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세 신입생 & 45세 신입생
결혼 후 취업을 해볼까 싶어 정말 오랜만에 대학 졸업장과 성적표를 찾아보았다.
오랜만에 본 대학 성적표는 대학 4년을 내가 얼마나 불. 성. 실. 하게 보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당시 썩 잘 보지 못했던 내 수능 점수와 돈 많이 드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 안정권으로 원서를 내서 합격 인원을 늘려야 했던 담임선생님의 삼박자로 점수에 맞춰 갔던 학교와 학과였다.
그래서 난 학교에 크게 정이 가지 않았었고, 다니면서도 친해지지를 못했고 4학년이 되어서는 거의 절교를 했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하지만 굳이 찾은 이유가 뭐가 되었든 불성실한 4년을 보냈던 것은 내 잘못이었고 성적표는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불성실한 4년의 증거를 첨부한 이력서를 냈던 회사에서는 불합격 문자를 보냈다. 이런 학점으로 경력 하나 없이 더군다나 결혼한 아줌마를 뽑아 줄리가 없지라고 나 편한 대로 생각하며 그 당시 난 취업을 포기했었다.
그러면서 난 나의 대학생활을 떠올릴 일 없이 또 잊고 살았다.
어느 날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 너 요즘 뭐 해. 잘 지내니~
"난 열심히 알바하고 애들 밥순이 하면서 지내지 "
" 아,, 너 알바,, 그걸 잠시 잊었네.
오전에 학교 와서 일해 볼 생각 있나 물어보려고 했지.
" 무슨 일인데? 아니다 통화하자 "
카페와 샌드위치 알바를 이틀씩 요일별로 해도 100만 원이 안 돼서 기운 빠지고, 나의 관절들이 점점 더 삐그덕거린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친구는 초등학교 특수 교사였고 도움반 아이들(특수아동)이 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인력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조건이라면 고졸이상, 애 키워본 아줌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이력서를 내 볼 생각이 있냐 물었다.
너, 범죄자는 아니잖아?!라는 실없는 농담과 함께.
주 3일 14시간 근무에 70만 원.
금액이 크지 않지만 학교라는 곳에 발 들일 입문 경력으로는 좋다고 했다.
그러니 할 생각 있음 이력서를 넣어보자고 정말 빛의 속도로 채용공고를 보내주었다.
(개학 직전까지 사람이 잘 구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실토하였다. 이노무 지지배..)
솔직히 친구의 농담과 진담이 섞인 말을 들으며 뭘 해도 100만 원이 넘긴 힘든 걸까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에게 난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를 외치며 내 민낯을 내보이기에는 약간의 민망함이 있어서 금액이야 뭐~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어쨌거나 뭔가 새로운 일이었고 일하는 곳이 학교라 하니 나 안 해! 라기에는 은근히 아까운 제안이었다.
더불어 이 일을 시작으로 내년에는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한 긍정 에너지가 마구 샘솟기도 했다.
그동안 당근알바에서 간단한 약식 이력서만 쓰고 알바 지원만을 하다가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시 나의 불성실했던 4년을 마주하게 되었다.
졸업하기 위해 실습을 나갔던 복지관에서 자폐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레고로 얼굴을 얻어맞아 피를 몇 번 본 이후 이 일은 나와 맞지 않다고 절대 이 일은 안 한다고 다짐했었던 나의 전공 사회복지.
잊고 있었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회복지 1급 자격증이 있는 아줌마였던 것을.
친구는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내가 사회복지라서 금상첨화라 얘기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할 수 있을까란 걱정은 접어둔 채로 사회복지 전공이라 다행이야를 백만 번 외치고 이력서를 정성스럽게 작성해서 지원하였다. 그리고 3월 학교 개학에 맞춰 여태껏 과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샌드위치 알바 출근길에는 머리카락이 떨어질까 모자를 쓰거나 넓은 헤어밴드를 꼭 차고 출근했고 일하기 편하게 츄리닝을 고수했지만 이제는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고 드라이로 머리도 좀 매만지고 전철을 타고 학교로 출근을 했다.
그 아침에 복잡한 전철 안에 출근하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는 게 이상했다.
이 시간에 전철로 출근이란 걸 해보는 게 몇 년 만이더라..
이렇게 풀 메이크업을 하고 적당히 꾸민 옷차림, 정성스럽게 드라이한 머리까지.
어차피 주 3일의 1시 반까지의 아르바이트개념의 일이었지만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각할까 걷고 뛰고 있으니 난 내가 꽤나 커리어 우먼 같이 느껴져서 이른 출근길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가끔 한 손엔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가진 옷 중 제일 깔끔한 옷을 입고 그 아침에 전철을 타고 있으면 순간 내가 전문직의 커리어우먼처럼 느껴졌다.
난 그 기분을 더 느껴보고 싶어 가끔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코트자락 휘날리며 한껏 멋을 부리며 출근을 하기도 했었다. 그날 그 밤엔 발마사지가 필수였지만 말이다.
(이 일 역시나 편하게 입으면 그만인 일이긴 하다. 선생님들보다도 내가 더 힘주고 다니는 느낌이라 살짝 민망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출근길에 가끔 만나는 지인은 그런 날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다가 코 앞에서 날 알아보기도 했다.
편한 점퍼에 스니커즈는 익숙하지만 코트에 힐을 신은 난 낯설다 했다.
학교는 학기제로 운영되는 공간이니만큼 일의 시작은 새 학기이고, 그 날짜에 맞춰 난 3월 4일 초등학교 특수아동 보조인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난 아이들을 보고 너무 예뻐! 어머어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으로 성장해서일까?
첫 출근해서 내 눈앞에 보이는 운동장을 가득 메운 초등학교 1학년들이 마냥 귀엽고 예뻐 보였다.
운동장의 잘 차려입은 꼬마 신사 숙녀들의 얼굴에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 떨림 약간의 무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은 그 공간에 같이 서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난 잘해야 할 텐데란 생각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을 하느라 입학식의 소란함이 내 안의 소란함인지 아이들의 소란함인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2024년 3월, 난 샌드위치를 만들지 않아도 배민 소리에 움찔하지 않아도 커피를 내리지 않아도 양상추를 씻지 않아도 되는 내 자리에 내 책상이 있는 이곳 초등학교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나는 또 무엇을 느끼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내가 레벨업이 될 것인지 그 반대가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리 생각해도 적은 돈 70만 원을 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