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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좋은 조식을 만들어주지

조식을 만드는 시간

by 나조식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 가운데 ‘입동’에 나온 이 문장을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단편집을 읽었던 그 해, 주변 지인들에게 보낸 모든 송년 인사 메시지에 이 문장을 인용했고 지금도 틈나는 대로 이 문장을 인용해 가며 글을 쓰고 이야기를 꺼낸다.

과학 기술의 발달 덕분에 ‘제철 식재료’라는 것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제철 식재료의 등장과 퇴장은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가령, 매년 6월쯤 집 근처 시장의 과일 가게에 살구가 등장하면 ‘아,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 건가’하는 생각과 더불어 자연스레 버터와 설탕을 넣고 만드는 살구 콩포트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워도우에 리코타 치즈를 듬뿍 바르고 그 위에 살구 콩포트를 얹어서 한 입 먹으면 정말 맛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조건반사처럼 입안에 침이 고인다. 물론 먹는 것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자주 가는 마트의 해산물 코너에서 봉지에 든 굴을 발견한 날이면 집에 돌아와 ‘지난 번에 세탁을 해두었던가?’ 뒤적뒤적 옷장 속에 보관해 둔 겨울옷들을 확인해 본다. 이런 게 다 계절이 하는 일이다.


어떤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풍미가 깊어지고 향이 더해지기도 한다. 치즈의 발효, 김치나 된장, 간장, 고추장의 숙성은 모두 시간이 맡은 몫의 일부일 것이다. 60~70년대 미국에 프랑스 요리를 소개해서 대중화시킨 줄리아 차일드(Julia Carolyn Child)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줄리 & 줄리아(Julie & Julia, 2009)에 등장했던 소고기 요리, 뵈프 부르기뇽(Bœuf bourguignon)이나 '뭉그러지도록 익히다' 혹은 '진액만 남도록 푹 끓이다'라는 뜻을 가진 곰탕처럼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끓여야 하는 요리들은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재료들끼리 서로 어우러지고 녹아들면서 더 풍부하고 조화로운 맛으로 바뀐다.

‘별일이 없으면 날마다 어제와 다른 조식을 만들어 먹는다’라는 리추얼 가운데 ‘만들어 먹는 것’에 할애하는 시간은 보통 30분 남짓이다. 조식의 종류에 따라서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 이상 걸릴 때도 있는데 당연히 30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조식은 평일보다는 좀 더 시간 활용이 자유로운 주말에 기꺼이 양보하는 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쿡방 역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은 ‘냉장고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셰프들은 보통 15분 만에 한 끼를 만들던데 그것에 비하면 30분이란 시간은 한 끼의 조식을 만들기에 적당히 충분한 시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식을 만들면서 식재료 준비와 사진이나 숏폼의 숏을 위한 편집점 고려 그리고 적당한 메서드 손연기까지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어제와 다른’ 즉 생전 처음 만들어 보는 낯선 조식을 매일 맞닥뜨려야 한다면. 그래서 30분이란 시간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가끔 아침에 주어진 최대 30분의 시간 외에 반칙처럼 ‘시간이 맡은 몫’에 기대 가는 경우가 있다. 그건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온다(La nuit porte conseil)’라는 속담과 관계가 있다.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온다(La nuit porte conseil)’ 고 황현산 선생은 이 프랑스 속담을 '밤이 선생이다'라고 멋들어지게 번역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하룻밤 자고 나면 좋은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복잡하고 얽히고설켜서 풀릴 것 같지 않던 문제도 잠깐 머리를 식히고 다시 들여다보면 해결책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하룻밤’이라는 시간은 이런 문제 해결을 넘어 제 스스로 조식을 만들기도 한다.


병아리콩과 참깨로 만든 타히니, 마늘, 레몬주스, 올리브오일과 소금을 넣고 갈아서 만드는 후무스(Hummus)라는 음식이 있다. 우리나라의 김치처럼 중동 지역에서는 매 끼니 빠지지 않고 식탁 위에 등장하는 음식이다. 주재료인 병아리의 머리를 닮은, 이름처럼 작고 예쁜 병아리콩은 적어도 6시간 이상 물에 불려야 한다. 병아리콩뿐만 아니라, 청태, 먹동부, 각시동부, 호랑이콩, 강낭콩 같은 우리나라의 콩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모든 콩이 ‘하룻밤’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렌틸콩이나 완두콩처럼 불릴 필요 없이 바로 사용가능한 경우도 있다. 게다가 정말 시간이 없다면 압력솥을 사용해서 단시간에 쪄서 사용하는 편법도 동원할 수 있지만 콩을 불리는 그 몫은 온전히 하룻밤이라는 시간에 맡겨두고 싶다.

일본어로 유바(湯葉), 중국어로 푸주(腐竹)라고 부르는 말린 두부피도 ‘하룻밤’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두유를 만들 때 끓이는 과정에서 표면에 생기는 얇은 단백질 막을 가공해서 만드는 두부피는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풍부한데 식감도 꽤 매력적이다. 하룻밤 불린 두부피를 토마토, 마늘과 함께 살짝 볶은 뒤에 굴소스와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남부럽지 않은, 정말 건강한 조식을 맛볼 수 있다.


‘시간이 맡은 몫’은 어쩌면 발효과 숙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900ml 정도 되는 큰 우유 한 팩과 작은 플레인 요거트 한 병을 전기밥솥에 붓고 보온모드로 1시간, 그 상태 그대로 전원을 끄고 12시간 정도 두면 ‘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노래를 부르며 마치 장까지 살아서 갈 것 같은, 유산균이 펄떡이는 요거트가 만들어진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면포에 싸서 묵직한 냄비로 눌러두고 하룻밤을 보내면 유청이 빠진 꾸덕한 그릭요거트가 두 그릇 정도 나온다. 발효와 숙성의 하룻밤이다. 이렇게 걸러진 유청과 우유나 요거트를 1:1로 섞고 약간의 레몬주스를 더하면 인도의 전통 음료 라씨를 만들 수도 있다.


한편 저 홀로 독야청청, 하룻밤 사이에 스스로 완성되는, 그래서 숙성의 하룻밤을 증명해 주는 조식도 있다. 오버나이트 오트밀(Overnight Oats), 줄여서 오나오다. 전날 밤 오트밀에 우유, 요거트를 적당한 비율로 붓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다음 날 아침 퍽퍽한 종이맛 오트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유, 요거트와 혼연일체, 한 몸이 된 오트밀만이 남아 솜사탕처럼 입속에서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나야, 오트밀’ 하고 속삭인다. 여기에 신선한 과일을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들시들한 과일만 널려 있다면 콩포트로 조리해서 오트밀에 곁들인다. 정말 감쪽같이 맛있다.


조식은 당연히 아침에 일어나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밤사이의 단식(Fast)을 중단(Break)하는 것이 조식(Breakfast)이고 그건 당연히 조식을 만드는데도 적용된다. 가령, 나는 전날에 미리 만들어 둔 음식은 조식으로 볼 수 없고 심지어 그건 조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식이 하루를 시작하는 리추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침에 만들어 아침의 기운을 담은 음식이어야 한다.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마라’는 얘기가 있다. 밤에는 감정이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고 따라서 이성적 판단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 상태에서 쓴 글은 반드시 후회와 부끄러움을 남긴다는 얘기다. 흑역사가 보장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식재료만큼은 하룻밤의 시간을 거쳐도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거나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로 바뀔 것 같진 않다. ‘흥, 오늘 밤에는 좀 더 심하게 발효가 될 테닷’하고 평소보다 더 충동적으로 발효와 숙성이 될 것 같진 않다. 심야식당 ‘어제의 카레’편에서 마스터는 이렇게 얘기한다. ‘방금 만든 카레보다 하룻밤 재워둔 카레가 더 좋다는 사람이 꽤 있다. 나도 뭐 그렇긴 하지만’ 가끔 어떤 조식은 ‘어제부터 준비한 오늘의 카레’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전날 밤에 시작해서 ‘시간이 맡은 몫’이 닉값을 다하는, 간혹 발효과 숙성의 과정을 거친 조식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La nuit est la plus grande des cuisinières.(밤은 가장 위대한 요리사다)




아게비타시(揚げ浸し), 간장 소스에 마리네이드 한 야채튀김이다. (아게가 튀기다, 비타시가 담그다는 뜻) 각종 채소를 오일에 튀겨서 간장 베이스의 소스에 하룻밤 마리네이드한 아게비타시 또한 제 스스로 완성이 되는, 밤이 만드는 조식이다.



잠들기 전 오밤중에 채소를 튀겨 하룻밤 마리네이드하고 소면을 삶아서 곁들인 #아게비타시 소면


재료

소면 조금, 각종 채소, 토핑용 한 조각과 고추냉이, (국물) 물 300ml, 미림 100ml, 간장 50ml, 쯔유 50ml, 생강 1t


조리

1. 물 300ml, 미림 100ml, 간장 50ml, 쯔유 50ml, 생강 1t 넣고 끓인다.

2. 식는 동안 팬에 오일 넉넉하게 두르고 채소를 튀긴다. 가지, 애호박, 토마토, 버섯, 단호박 뭐든 좋다.

3. 그릇에 2를 차곡차곡 담고 1의 국물을 부은 다음 냉장고에 넣어둔다. (30분 이상 하지만 하룻밤 정도를 권장합니다.)

4. 끓는 물에 찬물 부어가며 소면을 삶고 찬물에 헹군다.

5. 그릇에 소면 담고 숙성시킨 3의 채소를 담는다. 1의 국물과 찬물을 1:1 비율로 섞어 붓는다. (진하게 드실 분들은 물에 희석시키지 않고 그냥 드셔도 됩니다. 조식이라서 다소 슴슴하게 물을 탔습니다.)

6. 간 무와 고추냉이 얹는다.


#조식 #레시피 #미라클모닝 #아게비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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