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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6일 목요일의 아름다움

그림도 사진도 없이 글로써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

by 마부자


금주 37일째,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와 창앞에 선다. 여전히 창밖은 차갑게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 것은 창밖에 풍경이 내가 어제까지 서있던 시간과 장소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주차해 있던 차들이 보이고 청소하는 청소부가 눈에 들어온다.


새벽을 지키고 서있던 어둠이 서서히 한 걸음씩 뒷 걸음치고 새로운 빛의 기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비록 창밖은 겨울 동장군이 몰고온 꽃샘추위가 넓은 어깨로 버티고 있지만 봄은 이미 오고 있는 것이다. 봄의 여신은 동장군을 몰아내듯이 보내지 않는다. 밝은 빛으로 서서히 스며들듯 동장군에게 자리를 내어 받는 것 처럼.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습관과 루틴도 서서히 이전의 내 몸속에 있던 습관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루틴을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명상을 시작하고 하루의 루틴을 완성해 나간다. 오늘도 이전의 나에게 조금 더 그 옆자리를 내어 받듯이


그리고 책상앞에 앉았다. 새로운 책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소설분야이지만 그동안 내가 한번도 접하지 않았던 분야의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공간'이었다.

요즘 들어 하루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내 방 서재, 이 작은 공간이 문득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침이면 같은 자리, 같은 조명, 같은 공기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해가 저물어도 여전히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기분. 공간이 나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두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커튼을 바꾸고 바닥의 카펫을 정리하면서 서재의 분위기를 조금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 솔솔 피어올랐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싶다기 보다는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좀 바꾸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혹시 공간에 관련 된 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공간과 건축에 대한 책을 찾아보니, 대부분 자격증 또는 인테리어에 관련된 전문 서적들이었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찾다가 얼마전 어렴풋이 관련 책의 리뷰를 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두 분의 블로그 중 한 분 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늘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두분 “여르미도서관” 아니면 ‘희망꽃’ 일 것이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희망꽃”님의 블로그에서 서평을 찾을 수 있었고 난 주저없이 책을 선택 한 책이 바로 백희성 작가의 <빛이 이끄는 곳으로>였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부터 지금 내게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다. 빛이 이끄는 곳으로—나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내 공간은 과연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품은 채, 주저 없이 첫 장을 펼쳤다.


이 공간이, 그리고 이 책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맞이해 보고 싶다.

몰입의 이란 단어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쉼 없이 긴장하며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빛이 가르키는 방향을 찾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열쇠를 끼워 맞추는 순간엔 마치 내 눈앞에서 비밀을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미스터리한 비밀을 품은 병원과 오래된 주택,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흔적들. 이야기는 하나씩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전개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잊혔던 기억들이 빛을 따라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주인공과 함께 그 문들을 열어 보며, 그 속에 스며든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건축물.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공간들이 빛과 만나 조화를 이룰 때, 얼마나 경이로운 자태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작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그의 문장은 마치 햇살이 천천히 스며들 듯 독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건축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을 품고 이야기를 간직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가 묘사하는 공간에는 기술적 지식이나 경험을 뛰어넘는 감각이 있다. 오랜 세월 쌓아온 깊이와 통찰이 없다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빛이 머무는 자리,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까지—작가는 건축을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감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건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27년 동안 건설 관련 회사에서 일하며, 거대한 빌딩부터 작은 전원주택까지 수없이 많은 현장을 다녔다. 땅을 파고 기초를 놓고, 철골이 세워지고, 마침내 건물이 완성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그렇게 도시가 형성되고, 삶이 이어진다. 나에게 건축은 늘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읽으며,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정말 건축을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지난 27년 동안 나는 그저 ‘눈에 보이는 건물’만 바라보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건설업을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분야에 관심을 돌리게 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건축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단순히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빛과 시간 그리고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공간에 대한 소설이라 사실 책 속에 이미지 또는 사진도 많이 들어있을 줄 알았던 내 선입견도 철저히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단 한 장의 사진도 실려 있지 않은 작가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나의 첫 느낌은 “아름다운 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림도 사진도 한 장 없이 글로써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 그 것이 바로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눈으로 읽고 머리로 그린 사진첩 같은 책을 마무리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의 영상은 조 디스펜자 박사의 <꿈을 이룬 사람들의 뇌>라는 책에 대한 영상이다.

오늘 영상 중 기억에 남는 하나를 적어본다.

뇌를 바꾼다는 건,
미래를 바꾼다는 걸 의미한다.
용기를 내기 바란다.
우리 모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한가운데 있는 고요한 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 그곳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하와이대저택 - 조 디스펜자


뇌에 대한 연구는 어쩌면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보니 뇌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를 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난 또 한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운동을 마쳤다.


오늘은 두 가지 일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막내의 학교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퇴원한 지 1년이 되었고, 처음에는 매달 다니던 병원을 이제 4개월에 한 번만 가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병원은 언제나 긴장감을 동반하는 곳이다.


문제는 내가 아내의 병원 일정을 깜빡한 채 막내의 졸업앨범 위원회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학부모 참관 요청이 있었고 아이를 위해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뒤늦게서야 아내의 병원 일정과 겹친다는 걸 알았다. 물론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오는 간단한 과정이었고 요즘 아내의 컨디션을 보면 혼자 다녀와도 충분할 테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학교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에 함께 가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내 걱정 말고, 막내한테 더 신경 써줘."


아내는 아침에 출근을 한 뒤 오후에 조퇴해서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굳이 자기까지 신경 쓰지 말라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묘해졌다. 오랜 시간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며 보내던 날들이 떠올랐고, 그런 날들을 견뎌내며 여기까지 온 아내의 단단함이 새삼스러웠다.


밖은 영하의 추운 날씨였지만 집 안의 온도는 포근하게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란 결국 이렇게 온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날이 추운데도 아내는 끝까지 혼자 가겠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서 데리러 가겠다고 해도,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결국, 나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도착할 때까지 계속 통화하는 걸 조건으로 아내와 협상을 했다. 그렇게 아내는 출근을 했고 나는 운동을 마친 후 막내의 학교로 향했다.


문득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늘 같은 복장으로 출근했다. 고객을 직접 상담하던 초년 시절부터 이어진 습관이었고, 어쩌면 하나의 루틴이었다. 한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반짝이는 구두까지.


일주일 내내 같은 스타일의 옷만 입었다. 그러나 퇴직 후에는 정장을 입지 않았다. 외출할 일이 있어도 늘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막내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부모가 함께 모여 회의하는 자리였다. 캐주얼한 복장은 다소 격식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옷장 구석에 걸려 있던 정장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입은 게 두 달 전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입어보니 너무 불편했다. 마치 남의 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체중이 3kg 정도 줄었으니 옷이 헐거워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더 조이는 느낌이었다. 몸이 변한 건지, 아니면 정장이라는 감각 자체가 낯설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20년 동안 익숙했던 옷이 단 두 달 만에 낯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적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오래 해온 습관이라도 꾸준히 지속하지 않으면 결국 낯설어지는 것. 루틴이든, 습관이든,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가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는 존재라는 걸, 그리고 그 변화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아내가 좋아하는 가래떡이 떠올랐다. 떡볶이용 떡까지 함께 사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 걸린 "점검 중"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오늘 정기점검이 있다는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순간 한숨이 나왔지만,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10층까지 오르는 길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매일 자전거 페달을 밟는데도 계단 오르기는 또 다른 문제였다. '조만간 계단 오르기도 운동 루틴에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아내에게서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책 리뷰 작성을 마무리한 뒤, 저녁으로 떡볶이를 준비했다. 아내와 막내가 집에 들어오고, 우리는 함께 이른 저녁을 먹으며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다행히 아내는 의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녹음을 해두고 계속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5월 15일에 다시 병원에 가야 하고, 8월에는 뇌혈관 출혈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혈관조영술을 시행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입원해 세 차례 수술을 받고, 추가 출혈이 예상되는 부위까지 수술한 것이 8월이었다. 최종 수술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영술을 통해 수술 부위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웃었지만, 정작 아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혈관조영술이 걱정되는 듯했다. "그냥 검사일 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다독였지만, 아내의 표정을 보니 이 일정이 다가오는 동안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걱정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옅어질 거라는 것을. 그래서 절대로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시간을 함께 견디면 될 일이다.


아내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서재로 들어와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하루를 돌아보며, 우리는 늘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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