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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난 결국 막내에게
내 무지의 소치를 사과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날 배신했다.

by 마부자

금주 68일째, 이제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된 루틴을 마무리하고 책상에 앉았다. 어제 나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곁에 서 있었다. 그의 결의와 숨결이 느껴지는 자리에서, 나 역시 가슴속 한 자루의 권총을 움켜쥔 채 방아쇠를 당겼다.


어제 품고 있던 그 권총을 조용히 가슴속에서 꺼내어 책과 함께 묻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친다.


올해는 최소 한 달에 한 권씩 세계문학전집(민음사)을 읽기로 했다. 그 목표를 위해 이번에 선택한 책은 막내가 추천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그러나 내 무지의 소치로 인해 막내에 잠시 부끄러운 아빠가 되었다.


얼마 전, 막내에게 앞으로 고전 문학을 자주 읽어보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혹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추천했다.


"오케이! 셰익스피어라면 내가 원하는 기준에 딱 맞지!"


유명한 작가, 깊이 있는 작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제목도 정확히 묻지 않고 바로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셨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생각하신 그 것이 바로 정답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말 부끄러운 건, 그 사실을 책을 주문하는 순간에도 몰랐고, 심지어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도 몰랐으며, 박스 포장을 뜯고 책꽂이에 넣을 때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저 ‘셰익스피어 = 4대 비극’이라는 단순한 연상 작용에 빠져, 셰익스피어 하면 가장 유명한 작품이니까라는 안일한 판단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택했다.


어제 저녁, 나는 막내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빠, 내일부터 특별히 네가 추천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려고 해!"


막내는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어보시라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 읽으려고 한다니까!"

그 순간, 막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나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막내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동시에 씁쓸한 듯한 얼굴.


측은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그 표정은 마치 “내가 대체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라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막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제가 알기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안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제야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큰일 났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아, 몰랐네. 내가 착각했어." 라고 말했다면, 좀 덜 창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잠깐 방심한 사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꼰대 기질이 전두엽을 장악하고 말았다.


나는 괜히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치듯 말했다.

"아닐 걸?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닐까? 분명 로미오와 줄리엣이 맞을 텐데?"


막내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말없이 검색 결과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내가 찾으려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나는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막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내가 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그럴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들고 막내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 아들!."


사실 내가 어떤 책을 읽든 막내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막내가 추천한 책을 그대로 따를 의무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확인도 하지 않고 내 생각이 맞다고 단정 지은 것, 그리고 명확한 근거 없이 "네가 틀렸을 거야." 라며 막내의 말을 밀어붙인 것. 나는 그 순간, 막무가내로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내 생각만으로 책을 주문한 내 자만심을 사과했다."

"명확한 근거 없이,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이 틀렸을 거라고 우긴 내 고지식함을 사과했다."


막내는 내 사과를 듣고는 한참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 근데… 그 책도 재밌으니까 그냥 읽어 보세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이 아니라고 해서 못 읽을 건 아니니까.

그렇게 어이없는 실수로 시작된 이번 달의 세계문학전집 읽기는, 예상보다 더 재미있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아직 못 읽어봤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한 번도 읽어본 적이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초라한 위안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나는 조용히 책의 첫 장을 펼쳤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과 결이 너무 달랐다. 솔직히,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지난달 초에 읽었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이 작품도 연극 대본 형식이라는 걸 책을 펼치고서야 알았다.


일반 소설처럼 읽자니 문장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었고, 연극 대사처럼 읽자니 전체적인 맥락이 이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예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책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독서의 방식을 배울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오전에 읽고 잠시 책을 덮어두고 아내와 늦은 점심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막내는 허겁지겁 밥을 먹더니 소파로 달려가 TV를 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봤더니, 야구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어제부터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주말, 삼성과 SSG의 경기가 대구에서 열린다고 했다.


화면 속 대구스타디움은 시범경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관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파란 물결과 붉은 물결이 뒤섞인 풍경이 정규 시즌 못지않게 뜨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막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야구장을 갈까, 말까?"


그 순간, 나는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저기, 아드님. 고3이십니다!"


막내는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눈치를 챘다.

"앗! 그쵸? 올해는 참아야겠죠? ㅎㅎㅎ"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눈빛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기에, 그리고 올해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막내는 아쉬운 듯 TV 화면을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참아야죠. 대신 내년에는 꼭 보러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줬다.

"그럼, 내년엔 제대로 보러 가야지." 우리의 2025년 개막전은 그렇게 약속되었다.


딸과 막내는 스스로를 덕후라 부를 정도로 야구를 좋아한다. 물론 나도 야구를 좋아하지만, 두 녀석에 비하면 ‘좋아한다’는 표현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대구에 살면서도 두 녀석 모두 삼성 라이온즈 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야구의 도시, 대구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15년을 살았으면서도 말이다.


한때 내가 고향 팀인 인천 SSG 랜더스를 응원했더니 어느새 두 녀석 모두 나를 따라 SSG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아빠를 따라 보는 것 같더니, 이제는 선수들의 타율과 OPS를 줄줄이 외우고, 경기 흐름을 분석하며, 심지어는 내가 놓친 경기의 하이라이트까지 챙겨서 알려주는 수준이 되었다.


요즘은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 되면서, 지역 연고의 의미도 예전 같지 않다. 전국 각지에 다양한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흩어져 있고, 덕분에 직관을 가도 원정 팬들과 함께 응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대구 사람이면 삼성 팬이어야 한다 같은 논리는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덕분에 우리 가족도 대구에 살면서 SSG를 응원하는, 조금은 독특한 팬들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본격적인 야구 시즌이 시작되었다. 작년 같았으면 벌써부터 흥분해서 아이들과 야구장에 몇 번은 가자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 경기부터 직관을 갔을지도 모른다.


경기 일정표를 확인하고, 어느 좌석에서 볼지 고민하고, 응원가를 흥얼거리며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올해만큼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2024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내 시야를 좁히기로 했다. 길을 가다가도 멋진 가로수를 바라보지 않고, 계절이 바뀌는 산과 들판도 눈에 담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앞만 보고 가기로 했다.


이런 선택을 두고 사람들은 다양한 표현을 쓴다.

"셀프 고립, 선택적 고독, 자의적 외로움."


어쩌면 나도 그중 하나를 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 3인 막내를 위해서라는 명분도 충분하다. 이 것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식사를 마치고 나니, 각자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막내는 학원에 가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야구를 보겠다고 TV 앞에 앉았다. 집중하는 모습이 꽤 진지해서, 마치 본인이 직접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선수라도 된 듯했다.


늦은 점심을 마친 아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아내가 이렇게 바쁘게 준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볼링장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를 쉬었으니, 오늘만큼은 절대 쉴 수 없다는 아내의 단호한 선언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어제 나에게 시간을 양보해 준 사람이었기에, 오늘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매니저 모드로 돌아갔다.


볼링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게임을 마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말했다. "어차피 나온 김에 간단히 저녁 해결하고 가는 게 어때?" 나도 동의했고, 마침 학원을 마친 막내와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집 근처 중식당에 들러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뜨거운 짬뽕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몸에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막내는 바삭한 탕수육을 집어 들며 연신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주말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8시.

나와 아내가 느끼는 이 시간의 체감온도는 전혀 다르다.

내일을 기다리는 나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아내. 남은 시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체감온도를 정상으로 맞추기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난 책상에서 아내는 소파에서 그리고 막내는 친구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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