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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책은 때때로 사람보다 더 깊은 스승이 된다.

수 백년전 스승을 집에 한 분 더 모셔두었다.

by 마부자 Mar 11. 2025

금주 69일째, 저 건너 동녘에 시샘하는 빛살이 터진 구름 수놓는 걸, 밤 촛불은 다 꺼지고 유쾌한 낮의 신이 안개 낀 산마루에 발끝으로 서 있다오. (110page)


음…. 어제 읽은 책에서 로미오가 줄리엣과 밤을 보내고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창문을 열지만 저 멀리 아침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며 줄리엣에게 말하는 장면의 대사다.


새벽녘 떠오르는  해를 보며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셰익스피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새벽 기상 후 느낌을 적기 시작한지 3개월이 다 되어간다. 처음엔 "달이 지고 해가 뜬다.” 로 쓰다가 “어둠이 사라지고 새벽 노을이 밝아온다.” 는 표현으로 바꾸고 스스로 감동 받는 나에게 셰익스피어는 비웃음을 던지 듯 이 표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라 좀 씁쓸했지만 그 표현을 쓰면서 원인 모를 흐믓한 미소가 흘러 나왔다. 


이제는 일기를 쓸 때 형광 불빛 보다 밝아진 아침 햇살의 도움을 받는 계절이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일기를 쓰는 계절이 올 것이다.


그 봄이 오면 내 감정 표현도 조금은 더 깊어질 수 있을까? 매일 적는 일기 첫머리에 루틴, 명상, 습관 이란 같은 단어는 겨울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자리에 봄날 나뭇가지에서 하나씩 삐져나오는 초록 잎사귀 처럼 많은 매일 새로운 표현을 느끼는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당분간은 닭살이 돋더라도 좀 더 써보며 연습해 보기로 했다. 언제쯤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ㅎㅎㅎ


책상에 앉아 어제 읽던 책을 펼친다. 그리고 책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본다. (줄거리는 "마부자의 책방에서~^^")


세계문학전집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생각했다. 이토록 비극적인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아니라면 4대 비극으로 인정된 네 편의 작품은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일까?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의 슬픈 결말, 두개로 갈라진 가문의 싸움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비극적인데 말이다.


최근 고전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수백년 전 쓰인 이야기들이 지금 21세기에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 로미오와 줄리엣도 내게 적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비극적 로맨스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운명과 사랑,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비극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감정을 강렬하게 일깨운다. 이 책을 읽고 다소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내용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몰랐다기 보다 그동안 내가 알던 슬픈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과 비극이라는 감성적인 요소에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로미오’라는 인물이 상당히 폭력적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야기 속에서 벌어지는 여섯 인물의 죽음 중 절반은 로미오의 칼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하며, 나머지 죽음 역시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깊다. 이를 단순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만약 작가인 셰익스피어가 로미오를 의도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그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책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연애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불러오는 결과를 철저히 탐구하는 작품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로미오는 사랑에 빠진 청년이지만, 동시에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성향의 인물이다. 티볼트를 살해한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친구인 머큐쇼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고, 파리스를 죽인 것도 감정적인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로미오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결국 줄리엣과 함께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가 티볼트를 살인하게 되면서 추방된 충격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몬터규 부인)이 죽게 된다. 


그러나 로미오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난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로미오”를 선한 존재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모든 과정은 ‘로미오’라는 인물이 사랑과 비극을 초래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감정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폭발하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치밀하게 그려내는 작품으로 해석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왜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감정적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그리고 로미오는 단순히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주변을 파괴하는 인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로미오를 평가한 주관적인 생각이다.


최근 사랑이라는 감정 보다 뇌, 자기계발, 성공, 경제에 대한 내용을 읽다 보니 사랑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좀 머리를 식히려고 해서 선택한 책인데 그동안 읽었던 책들로 인해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다. 감성적이 이 책을 반항적 문제아를 다룬 내용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은 유머와 재치도 가득하다. 특히 유모와 로런스 수사는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며, 한편으로는 이들이 조력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을까 싶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줄리엣의 유모는 전형적인 '수다쟁이'이지만, 그녀의 대화에는 현실적인 조언도 많다. 때로는 줄리엣에게 사랑에 대해 조심하라고 충고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특히 로미오를 처음 만난 후, 줄리엣에게 그의 소식을 전할 때 일부러 뜸을 들이며 애태우는 장면은 너무나 익살스럽다.


로런스 수사는 조금 더 진지한 캐릭터이지만, 그 또한 재치 있는 대사를 자주 던진다. 그는 젊은 연인의 사랑이 너무 급작스럽다며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도, 결국 두 사람의 비밀 결혼을 주선한다. 이 모순적인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위트와 유머는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독자들이 극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 작품이 쓰인 16세기 영국은 르네상스 시대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개인의 감정보다는 가문의 명예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가문의 갈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위험한 행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결말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가 지금과는 달리 철저하게 가문의 이익과 연결되었던 시기였음을 생각하면, 줄리엣이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런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용기를 조명하며,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책은 때때로 사람보다 더 깊이 있는 스승이 된다. 다섯 번째도, 여섯 번째도 그러했지만, 일곱 번째로 선택한 이 500년 전 고전은 오늘도 나를 새로운 생각의 깊이로 이끌었다. 오래된 문장이지만 여전히 날카롭고, 낡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셰익스피어를 톨스토이, 헤ㅣ밍웨이, 조지오웰, 생텍즈페리의 곁에 조심스럽게 모셔두었다. 마치 모든 작가들이 나란히 앉아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운동을 시작했다. 


깊은 생각 만큼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마음과 몸, 둘 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운동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순간의 열정만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 쌓아 올린 작은 변화들이 결국엔 큰 차이를 만든다.


주말에는 운동을 쉬고, 월요일이 되면 지난주보다 강도를 조금씩 올린다. 무리하지 않되, 확실하게. 팔굽혀 펴기는 이제 144개까지 늘었다. 1월에는 50개도 겨우 했던 내가 이제는 150개를 바라보고 있다. 숫자가 쌓이는 걸 보면 신기하다. 같은 동작인데, 그때의 50개와 지금의 144개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실내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처음 2단계로 올렸을 때 허벅지가 당겨오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30분쯤은 가뿐하다. 더 이상 그 단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3단계, 4단계를 거쳐 결국 6단계까지 가려 한다. 언젠가는 6단계에서도 편안하게 달릴 수 있겠지.


운동은 숫자로도 보이지만, 몸이 직접 증명해준다. 처음엔 버거웠던 것들이 어느새 일상이 된다. 힘들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사라지고, 대신 더 높은 목표가 생긴다. 몸을 움직인 만큼 내 마음도 단단해진다. 이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굵은 땀방울과 함께 오늘 시청한 영상은 노먼 도이지박사의 책 <기적을 부르는 뇌>에 대한 영상이었다. 몇 일전 꿈을 이룬 사람들의 뇌 후속 편 겪인 것 같다.


실제로 하는 것과 상상을 병행하면 
우리 뇌의 신경회로는 획기적인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만약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면, 
상상으로 하라. 그러면 우리 뇌는 실제로 하는 것과 
같은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하와이 대저택


운동을 쉬는 날, 혹은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운동을 건너뛸 때, 머릿속으로만 운동을 상상해도 근육이 활성화된다는 사실. 예전 같았으면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연구가 이를 증명했다. 그리고 얼마전 책을 통해 깨달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자극을 받고, 뇌의 전두엽과 뉴런들이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사실.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믿는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내 몸이 직접 겪어왔기 때문에.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몸이 이렇게까지 변화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느낀다.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순간, 내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 이론도 실행해 볼 만하다.


운동을 쉬는 날에도, 나는 내 몸을 움직일 것이다. 눈을 감고,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하면 근육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믿고, 실행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마친 뒤, 집 정리를 마쳤을 때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내가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 이야기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인간의 운명, 젊음의 열정과 무모함에 대해 곱씹다 보니 시간 감각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시간을 빼앗아간다. 오늘 셰익스피어는 그의 이야기로 인해 내 시간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라면 기꺼이 빼앗겨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이런 생각의 순간들이 나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


둘만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로의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막내의 야간 자율학습이 11시에 마무리 되어 집에 오면 11시 20분 쯤 될것이라고 한다.


둘만의 저녁을 마치고,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정리한다. 하루가 길었던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저녁을 먹고 나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실감한다.


막내의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은 11시. 집에 도착하면 11시 20분쯤. 고3이라는 무게를 대신 들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두운 집에 혼자 들어서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고3을 둔 부모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10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지만,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막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적어도 환한 불빛과 따뜻한 기운이 그를 맞아줄 수 있도록. 그게 아주 큰 위로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누군가는 깨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오늘부터 잠드는 시간을 조금 조절하기로 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결국, 멀리서 묵묵히 등을 받쳐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그 작은 배려가 가장 큰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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