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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글을 쓰기로 다짐했던
처음을 생각했다.

책은 자신을 위한 선물이고, 글은 타인을 위한 선물이다.

by 마부자

금주 74일째, 토요일 아침, 약간의 늦잠에 창밖을 보니 동녘에서 퍼져오는 어스름한 거실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그 사이 어디쯤에서 머물러 있는 순간이 이제는 자연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이번 달 두 번째 세계문학고전으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이 책을 선택하기까지 꽤 오랜 고민을 했다. 작품성이나 필체에 대한 의심은 아니었다.


다만 제목에서 오는 막연한 거리감 때문이었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굳이 내 신념과는 다른 색채의 종교성을 가진 책을 읽어야 할까—그런 부담감이 나도 모르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편협한 태도가 아닐까. 지금은 내 생각과 다른 것을 거부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사상을 머릿속에 담아야 할 시기다.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동시에, 주저 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얼마나 좁은 시야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단지 제목만으로 이토록 훌륭한 책을 주저했던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싯다르타는 내가 아는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책 속에서 싯다르타와 부처, 즉 고타마가 조우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특정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경험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책의 줄거리와 내용은 오후에 따로 서평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오늘 일기에서는 개인적인 느낌을 남기고 싶다. 아니, 느낌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안락한 삶을 누리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모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고된 수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삶의 본질을 깨닫기 위한 긴 여정,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묵묵히 걸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헤세를 처음 접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어린 시절, 단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인 소년 싱클레어. 그 앞에 나타난 의문의 소년 데미안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결국 그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성장해가듯, 싯다르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느껴졌다.


다만, 싯다르타는 타인의 가르침이 아닌, 오직 스스로의 경험과 깨달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싯다르타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 자신도 모르면서,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난다. 이 책은 바로 그 치열한 탐색과 깨달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결국, 삶의 진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통해 스며들 듯 다가오는 것임을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직접 경험하는 길을 택한다. 즉,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색에만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생각이 아닌, 실제 삶 속에서 확인하고 체득하는 방식. 이 점에서 그는 관념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현실주의자처럼 보였다.


어쩌면 싯다르타가 걸어온 길을 단순히 바라보면, ‘도인’이나 ‘수행자’의 여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과정은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고 시행착오를 겪는다.

싯다르타가 걸어간 길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걷고 있는 길과 다르지 않다. 그는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배워야 할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싯다르타는 바라문 가문의 아들로서 부모의 그늘 아래 자라난다. 어쩌면 이 시기는 우리가 부모의 보호 속에서 자라나는 유년기와 닮아 있다.


그러다 사문들과 함께하며 극한의 수행에 몰입하는데, 이는 학창 시절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부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후 그는 세속의 세계로 나아간다. 마치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직장에 취직한 사람처럼, 카마스와미의 상점에서 일하며 부를 쌓는다. 승진을 위해 노력하듯 그는 사업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카말라라는 여인을 통해 사랑과 쾌락을 경험한다. 마치 어른이 되어 사랑에 빠지고 관계를 배우는 과정처럼.


그러나 그는 결국 이 모든 것이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여정인 강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난다. 이 만남은 마치 인생의 후반부, 조용한 성찰의 시기를 맞이한 우리가 인생의 멘토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 순간과 닮아 있다.


싯다르타의 여정은 결국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부모 아래서 자라고, 사회에 나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랑과 성공을 경험하고,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 그가 걸어간 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


헤르만 헤세는 젊은 수행자 싯다르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인생의 과정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하필 ‘싯다르타’라는 이름일까?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

그 이름을 곱씹으며 떠오른 단어들은 고난, 수행, 인내였다.


결국, 헤세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곧 고난의 연속이며, 수행과 인내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나와 세상은 하나"라는 범아일여의 사상과 연결해 보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결국 "세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사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작은 고난조차도 피하려 하지 않는가. 어쩌면 헤세는 그 점을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대한 세상을 논하고 비판하는 데는 익숙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는 한없이 미루고 도망친다.


이런 헤세의 쓴소리는 그의 시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도전하고,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가?


단 한 번의 도전,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방황만으로 쉽게 자신을 규정해버리고, 때로는 그걸 핑계 삼아 모든 가능성을 접어버리지는 않는가. 그러나 인생이란, 수많은 경험과 실패를 통해 더욱 깊고 풍요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를 통해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책의 두께에 비해 너무나 묵직한 통찰. 헤르만 헤세의 날카로운 질문들. 그리고 싯다르타의 긴 여정. 그렇게 토요일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강물이 상징하는 의미, ‘앎’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그러나 벌써 오후. 글을 쓰느라 시간이 훌쩍 흘렀고, 문득 고개를 들자 아내는 어느새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다. 볼링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조금은 아쉽지만, 오늘의 싯다르타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

책 속의 여운은 남아 있지만, 이제 현실 속 내 시간도 흘러가고 있다.


주말 아내와 볼링장으로 향했다. 아내는 볼링을 치고 난 뒤에서 구경을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울산에 계신 형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의 안부 전화였다. "어떻게 지내냐?"


형님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책도 읽고, 글도 좀 쓰고, 운동도 하고, 청소도 하고, 살림도 하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형님은 조용히 듣더니 문득 말씀하셨다.

"너가 작성한 글, 가끔 보고 있다."


순간 놀랐다. 블로그 이웃 신청을 하신 것도 아닌데,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예전에 주소를 알려드렸는데, 그걸 기억하고 가끔 찾아와 글을 읽고 계셨던 모양이다.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더라." 위로를 겸한 칭찬이었다.

형님은 원래 표현이 많은 분이 아니었기에, 그 짧은 한마디가 더욱 묵직하게 와닿았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괜스레 힘이 났다. "형님, 이렇게라도 봐주시는 게 어디예요. 덕분에 더 열심히 써야겠네요."라고 감사함을 전했다.


"근데 말이야, 글에 쩜(마침표)이 너무 많아서 보기가 힘들어. 그거 좀 줄이라고 댓글에 쓸까 했어. 전화한 김에 말해주는 거야! 형님은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난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이 읽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형님은 "내가 이런 말 해도 되지?" 하고 물으셨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되죠! 독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작가의 의무 아닙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만간 만날 것을 약속하며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문득 내 글을 다시 돌아보았다.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어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더 잘 들리게, 더 편하게 읽히도록 다듬는 것도 내 몫일 것이다.


아내와 볼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작성했던 일기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정말 내 글에 쉼표와 마침표가 많구나.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형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 읽어보니, 정말 수없이 많은 쉼표와 마침표가 문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제야 형님의 조언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내가 작성한 독후감을 보고 깨 달았다. 같은 형식으로 글을 써왔는데, 이상하게도 독후감에서는 쉼표와 마침표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다. '왜 독후감은 괜찮고, 일기는 이렇게 보일까?'


그 차이는 폰트에 있는 것 같았다.


일기에서 사용한 폰트는 쉼표와 마침표를 유독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독후감에서 사용한 폰트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일기의 폰트를 바꿔보았다. 그리고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같은 글인데도, 쉼표와 마침표가 훨씬 덜 거슬렸다.


형님의 조언 덕분에 얻은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때로는 작은 변화 하나가 글의 인상을 크게 바꿀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변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 글을 바라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


폰트를 수정하고 나서, 문득 스스로에게 던진 다짐이 떠올랐다.


"책은 자신 위한 선물이고,
글은 타인을 위한 선물이다."

마부자의 생각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했던 다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글을 돌아보니, 나는 그 초심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일기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 공간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써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글들을 포스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독자를 배려하지 못했다. 이쁘게 보이는 폰트만을 신경 썼지, 정작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저 익숙한 쉼표와 마침표의 나열이었지만, 독자들에게는 문장의 흐름을 끊어 놓는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정 폰트에서는 쉼표와 마침표가 유난히 커 보였고, 그 결과 문장은 자꾸 끊어지고, 맥락을 이어가기 어려운 글이 되고 말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글은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만큼,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은 글을 쓰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배운 날이다.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 그것이 결국 더 좋은 글을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물론, 형님의 말씀이 단순히 쉼표와 마침표를 많이 쓴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글을 써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만의 필체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 중요한 건, 독자의 의견을 듣고 변화했다는 사실.


그저 폰트를 바꾸었을 뿐인데, 내 글 속에서 튀어나오던 수많은 ‘지뢰’ 같은 점들이 사라졌다. 그 것만으로도 글이 훨씬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형님께 꼭 감사를 전해야겠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나를 한 단계 성장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고, 누군가 피드백을 준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한 시선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더 좋은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성장시킨다.

그 흐름을 스스로도 느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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