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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인간은 실패와 실수를
통해 성장한다.

생존이란 결국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by 마부자


금주 79일 째, 몸을 일으켜 창을 열었다. 창밖은 앞서가려는 봄의 옷깃을 붙잡던 겨울도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진 듯 어제와 확연히 다른 새벽공기를 들이 마시며 잠을 깨웠다.


아내와 막내 모두 지난 월요일 꺼내 입었던 패딩을 소파에 던져두고 어느새 봄점퍼를 꺼내 입었다.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이제 그만 모든 것이 따스한 계절이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침에 아내가 틀어 놓은 TV 뉴스에서 나오는 아나운서의 멘트에는 한겨울 차갑고 냉랭한 바람만 섞여 있다.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그 곳은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내와 막내가 꺼내 놓은 점퍼를 다시 장롱속에 넣으며 혼잣말을 했다.


“추운 겨울이 길었다. 이제 좀 따뜻하게 지내자, 너도, 나도, 세상도, 우리 모두."

책상에 앉아 어제 읽던 묘한 그 책을 다시 펼친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책의 내용과 줄거리는 “매거진 또는 아래 블로그”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당신은 무엇을 기.. : 네이버블로그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다. "왜 스토너는 좀 더 강하게 살아가지 못했을까?" 부당함을 맞닥뜨리면 싸워야 하고, 사랑을 붙잡고 싶다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타협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엔 답답했다. 세상은 원래 치열하고, 무엇이든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삶이라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삶이 아닐까?

마부자의 생각


스토너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창한 신념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끝내 세상에 큰 흔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는 대학 강단 한 귀퉁이에 머물며 평생을 살아갔다. 단 한 번도 돋보인 적 없는 사람, 조용히, 그러나 한결같이 자기 삶을 살아낸 사람. 우리는 그런 삶을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좀 더 다르게 보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살았다. 문학을 사랑했고, 학문의 길을 걸었고, 비록 짧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인생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냈느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으로 살아냈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 책은 단숨에 읽어내려가는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확 재미있어서 빠져드는 책이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어서 계속 읽게 되는 책.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잖아’ 싶었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이야기는 조용한데, 그 여운은 이상하리만큼 깊숙이 스며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스토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어쩌면 우리도, 혹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도 그렇게 조용히,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삶. 하지만 그 안에는 그만의 고유한 빛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묘한 중독성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왠지 허탈함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가 절대로 길게 느껴지지 않는 다는 신비함을 느낄 수 있는 매력도 있는 책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책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책 표지의 연필로 그린 그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반쪽은 남성의 인물이고 나머지 반은 책을 쌓아놓은 모습이었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기에 앞서 왜 이책의 표지를 이런 그림을 표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주인공 스토너의 불완전한 삶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스토너는 학문을 사랑했지만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가정에서도 소외되었으며, 사랑마저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타협과 체념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떠올려 보면, 그의 얼굴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의 미완성된 인생을 그대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또한 온전하지 않은 나머지가 책으로 비유된 것은 그가 삶에서 가장 의미를 찾았던 것이 문학이었음을 나타낸 것 같다. 스토너가 원했던 교육의 내면과 바깥세상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평생 채우지 못한 삶과 교육을 위한 그의 열정의 공허함을 표현한 것 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정말 읽을수록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발을 담그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중간에 책을 덮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그의 마지막 장면과 책의 표지가 교차되며 한 남자의 인생 여정이 눈앞을 맴돌았다.


오늘도 그렇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시계는 어느새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묘한 감정에 휩싸인 상태로 옷을 챙겨 입었다.


운동을 하며 틀어 놓은 영상은 스콧 배리 카우프만과 캐롤린 그레고어의 <천재 보고서>였다. 제목부터 강렬했다. 솔직히 말하면, ‘천재’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끌린 것도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어쩌면 평범한 사람일수록 그런 단어에 더 강한 호기심을 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영상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들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나왔다. 순간, 그 말이 내 머릿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들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하다.
분명 실패를 계속하고 있는데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는 것.
결국 더 많은 시도를 한 사람이 더 많은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창의적인 천재들이 따르는 절대 법칙이다.

하와이 대저택


결국, 인간은 실패와 실수를 통해 성장한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지만, 그 의미를 정말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실수를 용납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진화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수많은 오류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과정이 아닐까.


얼마 전 읽었던 <아파야 산다>에서 저자는 인간이 질병과 함께 진화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병에 걸리면서 면역을 얻고, 한 번의 고통을 겪고 나서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만약 인간이 질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생존의 원리를 생각하면, 우리가 저마다 지닌 유전자 속에는 ‘실패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능력’이 깊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단 한두 번의 실수에 쉽게 주저앉아버리는 건, 결국 생존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생존이란 결국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몇 번의 실패 때문에 스스로 가능성을 접어버린다면, 그건 곧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오히려 실패가 두려워지지 않았다. 실패조차도 생존을 위한 과정이라면, 나는 더 많은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비오 듯 흐르는 땀을 씻어내고 커피한잔과 함께 다시 책상에 앉았다. 스토너란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포스팅을 어떻게 작성해야 하나? ㅎㅎㅎ

솔직한 마음이었다. 다른 책들은 목차를 따라가며 정리하면 되는데, 이 책은 애초에 목차조차 없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신비로웠다. 그리고 방향을 잃은 듯 막막함이 느껴졌다.


문득 책 표지 속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마치 그와 침묵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을 갖고 내 언어로 온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지난 주말 아내와의 데이트에서 사온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쌀을 씻은 물을 냄비에 담고, 이제는 반통 밖에 남지 않은 2년된 묵은지를 썰어 넣는다. 그리고 대파와 양파를 넣어 푹 끓여 주기만 하면 완성이다.


김치찌개와 함께 먹으면 금상첨화인 음식이 구운 김이다.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어머니가 섬에서 보내주신 김을 꺼내 렌지에 굽는다. 검붉던 김 색깔이 열기를 받으면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하며 고소한 향이 올라온다. 그리고 잠시 후 압력 밥솥에서 마지막 열기를 뿜어내고는 고슬고슬한 밥이 완성되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더니 아내가 들어왔다. 얼굴 가득 활짝 번지는 미소. 그 순간, 집안 가득 퍼진 세 가지 음식의 오묘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배고픔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허기가 극에 달한 아내는 이미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변해있었다.


"옷이고 뭐고, 밥부터 먹어야겠어!"


그녀가 곧장 식탁으로 달려들기 전에 가까스로 붙잡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손이라도 씻고 오라고. 어차피 몇 초 차이인데, 그 짧은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이 귀여웠다. 그 사이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저녁을 차렸다.


별다른 반찬 없이도, 오늘 저녁은 오직 이 세 가지 음식만으로 충분했다. 우리가 마주 앉아 한입씩 음식을 나누는 사이, 식탁 위에는 대단한 대화도,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지만,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찼다. 결국, 행복은 이런 순간들에서 온다. 배를 채우고,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것.


뒷정리를 마치고 아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오늘 오후에 끝난 정읍 볼링대회 남자 결승전을 다시 돌려봤다. 아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결국 우승을 놓쳤다.


사실 이 선수는 작년 대회에서도 아내의 응원을 받았지만, 결승전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던 경험이 있다. 올해는 선수의 딸까지 직접 경기장을 찾아 응원했는데, 안타깝게도 결과는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수와 딸이 준우승 후 포옹하는 장면에서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급하게 화장지를 찾다가, 하필이면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금… 우는 거야?"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니, 울었다기보다는 그냥… 울컥한 거지."


그러자 아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춘기세요? 감수성이 예민해지셨네요?"

화낼 수도 없었다.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만큼 울컥한 건 사실이었다.


아마도 작년 결승전에서 그 선수가 실수한 순간,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 이긴 경기라고 생각했을 텐데, 단 한 번의 실수로 우승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때 그의 눈빛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다.


트라우마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다. 한 번 큰 실수를 하고 나면 그 기억이 발목을 잡아, 경기 결과도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결승 무대까지 다시 올라왔다. 그 과정을 떠올리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우승을 함께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선수의 끊임 없는 도전이 더 가슴이 뭉클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선수는 반드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아내 옆에 더 앉아 있다가는 '울보'라는 별명을 얻을 것 같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와 스토너의 감동과 오늘의 감정을 일기에 남기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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