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금주 81일 째, 하루 만에 전혀 다른 온기를 품은 공기를 마주했다. 눈을 감기 전에는 창밖에선 달빛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명상 후 눈을 뜨면 그 달빛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햇빛이 스며든다. 해와 달이 아주 짧은 시간, 같은 하늘에 공존하는 찰나. 그 시간을 알아차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조용한 명상의 매력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펼친 새로운 책은 김준태작가의 <왕이 절박하게 묻고 신하가 목숨걸고 답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인의 요구’에 의해 보상처럼 다가온 책이다. 노력의 결과로 얻은 선물은 언제나 그렇듯 묘한 무게감을 가진다.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 건넨 어떤 증거 같아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오늘의 이 행위가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기 전에 불현듯, 나 자신이 꽤나 편협한 독서를 해왔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책을 꽤 읽어왔다고 자부해왔던 지난 시간들. 얼핏 세어도 백 권은 넘는 책들 속에, 한국사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사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부끄러웠다.
물론 근현대사 몇 권은 읽었지만, 그것은 마치 시험공부의 연장선처럼 얇고 가벼운 인식에 불과했다. 그 이전의 역사, 뿌리에 가까운 시간들에 나는 무관심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동양에 살면서 난 그동안 서양의 문학에 대한 의미만 너무 탐구하고 심취해 있었던 것을 아닐까? 그러고 보니 중국 및 동양의 역사에 대한 책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의 책 편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야 할 책이 더 많아진다” 라는 말을 오늘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부터라도 한국사와 동양의 역사 속에 담긴 철학과 문학, 그 깊은 뿌리를 따라가는 시간을 반드시 꾸준히 가져야겠다고.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이 한권의 책이 한국역사에 대한 책이었다는 것도 나를 위한 어떤 의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내가 내 몸속에 흐르는 한민족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말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처럼.
김준태작가의 <왕이 절박하게 묻고 신하가 목숨 걸고 답하다>는 책문과 대책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책문이 무엇이고 대책은 또 무엇인가? 조선의 역사에서 왕과 신하사이의 대화를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던 내게 역사용어를 알려주며 책은 시작한다.
조선시대 시행된 ‘과거 시험’에서 임금이 출제한 문제를 ‘책문’이라고 하고, 응시자인 수험생의 답안을 ‘대책’이라고 한다.
나름 조선시대 역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오늘 처음 들어보는 이 생소한 역사단어를 알고 두 번 다시 역사를 잘 안다고 입밖으로 내뱉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장면을 연상해보았다. 다시 한번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무지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장면뿐이다. 수 많은 선비들이 창호지를 바닥에 놓고 글을 쓰는 장면과 장원급제한 선비들의 모습들만 떠오를 뿐이다. 정말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책문은 일종의 조선시대 과거시험 중에서도 가장 심화된 논술 시험 형태였던 것이다. 왕은 책문을 단순한 시험문제가 아니라 당시 국정 현안, 사회적 갈등, 정책 방향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긴 소통을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또한 응시자들은 이 책문이 단지 시험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정책적 대안을 담은 자신의 포부와 나라의 안위를 담은 진정 어린 조언을 담은 글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군신관계를 생각해보면 제목이 왜 목숨을 걸고 답해야 하는 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시대상을 참고하더라도 흥미로운 것은, 장원급제자들의 대책이 단지 형식적 정답이 아닌 철학적 성찰과 실천적 고민이 깃든 글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왕에게 아첨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직언하며 시대적 난제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답안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면서, ‘오늘날의 리더와 시민이 배워야 할 고전 속 지혜’를 알게 해주었다.
책을 읽다보니 수백 년 전 조선의 시험장이 단지 인재를 선발하는 곳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책 논쟁의 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장원급제자들이 쓴 답안 하나하나는 지금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깊이 있고 명쾌했다는 것에 놀라웠다. 500년도 넘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주고받은 대화라고 믿겨 지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시대를 상상해보면 왕과 신하의 소통은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깨닫게 된다.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 위기나 현실적 고민이 생길 때마다 인재들에게 명확한 질문을 던졌고, 신하들은 그 질문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진정성 있게 답했다.
태종과 변계량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중도를, 연산군과 이목은 인재 선발보다 왕이 모범을 보이는 인재 육성의 중요성을, 정조와 정약용은 잦은 인사 교체의 폐해를 소통하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 책은 리더와 인재가 서로 솔직히 묻고 답하는 ‘진짜 소통’을 통해 국가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존중하는 진정한 소통만이 조직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길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조선시대의 왕의 질문한 ‘책문’과 신하의 응답인 ‘대책’은 단순히 역사적 기록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등 여러 분야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유용하고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덮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차원의 생각을 남기고 싶다. 서평에는 쓸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처럼 책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이야기다.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소통 법, 그 것은 단순한 과거의 권력 구조나, 궁중의 이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과 신하, 그리고 그들 사이에 놓인 수많은 백성들. 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지켜낸 국가의 지속 가능성은 단순한 힘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근간에는 ‘소통’이 있었고, 그 소통 위에 ‘배려’와 ‘협력’이 있었다.
2025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그 안에서 내가 가장 간절하게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소통’의 부재였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핍이 만든 현실은 너무나 명확하고, 또 너무나 씁쓸하다.
완전히 둘로 나뉜 이념. 그로 인해 갈등하고 대립하는 국민들. 무언가를 함께 바라봐야 할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 가운데 있어야 할 정치인은 오히려 편을 가르며 국민을 도구화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가르기를 일삼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가장 위에 선 권력자는 국민을 설득하기보다 위협하고, 타협보다는 대립을 택하며, 마치 싸우는 것이 통치의 방식인 듯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다. 그 모습이 가장 비극적인 건, 그 방식이 이제 익숙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소리치는 사람’에게 익숙해졌고, ‘듣는 태도’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 보았던 왕과 신하의 대화는 절박함 속에서도 품위가 있었다. 의견의 차이가 있어도,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화는 서로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 태도가 결국 나라를 지켜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책을 온전히 읽어내는 독해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사실은 애초에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책이라는 건 작가와 독자가 100% 같은 마음으로 만나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생각의 일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부분에 진심으로 공감했는가라는 사실이다. 이번 책을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표지에 있는 작가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책 속에 아주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질문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른다. 답을 듣는 순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어 씁쓸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이 후련했다. 마지막 장을 덮고 거실로 향했다.
아내는 어느새 볼링장으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어제보다 더 활짝 핀 목련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어제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제의 봄이 다소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면, 오늘은 완연히 여름이었다.
햇살은 따가웠고, 심지어 바람조차 따스해서 나의 체온을 서서히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동안 떠나기를 거부하던 겨울 때문에 그동안 양보하고, 물러서고, 조심스러웠던 봄이 이제야 우리 곁에 도착했는데 그 봄을 기다렸다는 듯 여름이 먼저 밀고 들어온 건 아닐까. 순서라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지만, 때론 그것조차 아무 의미 없을 때가 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을 때, 차량 내부 온도는 2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라리 ‘초여름’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날씨였다. 온도 조절 장치를 AUTO에 맞추었더니 에어컨이 자동으로 작동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히터를 켰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계절의 변화 앞에서 우리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볼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연스럽게 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어제 막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실 어젯밤, 막내와 오늘 저녁 삼겹살을 어디에서 먹을지를 두고 꽤 진지한 협상이 오갔다. 서로의 일정표를 확인하며 머리를 맞댔지만, 우리의 볼링 일정과 막내의 학원 스케줄이 겹쳐버리는 바람에 마땅한 장소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조금 번거롭더라도 내가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계산과 분석 결과였다. 막내의 식성을 감안했을 때 외식보다 집에서 직접 구워주는 편이 더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막내는 식당에서 먹을 예정이었던 금액만큼 고기를 준비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나는 고기를 집으며 생각했다. “그래, 두 번 다시 삼겹살 먹자는 말 못 꺼낼 정도로 해주마.”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삼겹살 1.5kg과 각종 야채를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낸 건, 냉장고 깊숙한 곳에 묵혀 두었던 비장의 무기 묵은지였다. 삼겹살에 가장 어울리는 궁극의 조합. 내 나름의 완벽한 만찬 준비는 그렇게 끝났다.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분명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막내가 이제는 막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한 점의 고기를 구우며 나는 물었다. “이제는 배부르지?” 그런데 막내의 얼굴에는 대답보다 앞선 표정이 떠올랐다. 입보다 먼저 말하는 눈빛이 있었다. ‘설마 고기가 없어요?’ 그 짧은 표정 하나에 나는 뼛속까지 간파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내는 곧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오늘은 충분해요. 다음 주에 또 먹으면 되죠.” 나는 그 웃음 속에 담긴 조용한 압박, ‘다음에는 2kg 준비하세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오늘의 삼겹살 만찬은 막내의 만족 속에 마무리되었다. 조금 아쉬운 표정은 있었지만, 다음에 대한 기대까지 그것들이 이 저녁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내일은 아내의 단체전 시합이 있는 날이다. 나는 선수로 참여하지 않지만, 뒤에서 조용히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는 누군가를 응원하고 챙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앞에서 나서기보다 뒤에서 바라보는 일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지금, 그 자리가 어쩌면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