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우리 마음의 묵은 겨울을 녹이며, 늦지 않게 시작된다.
금주 82일째. 새벽 공기가 조금씩 다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유난히 조용했던 새벽, 창 틈으로 불어 든 바람이 이젠 차갑지 않았다. 한때는 움츠러들게 만들던 공기가, 이제는 내 체온을 은근히 올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봄이 왔다고, 내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평소보다 좀 더 창을 활짝 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었다.
명상을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어제 읽었던 책에 대한 포스팅을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늘 그래왔듯 내가 좋아서 했던 취미, 읽고 느낀 것을 정리하고 나누는 일이었기에 큰 고민 없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건 익숙한 서평의 문장을 따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느낌의 정체는, 내가 좋아서 했던 것과 누군가의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는 무언의 의무감 사이에서 생겨난 미묘한 긴장감이라는 걸. 그동안은 오롯이 내 기쁨과 만족을 위한 글쓰기였는데, 오늘의 포스팅은 거기에 ‘대가’라는 무게가 살짝 얹혀 있었다. 그 무게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작성했던 포스팅이 대충이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읽고, 그 책에 대해 궁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소중히 썼다. 그건 나만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는 무심히 흘려보내질 수 있는 글이라 해도, 나에게만큼은 정성스럽고 책임 있는 기록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올리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몇 번이고 맞춤법을 돌려보고, 틀린 문장은 없는지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눈에 밟히는 오타가 보인다. 왜 꼭 그렇게 시간을 들였는데도 틀린 글자가 보이면 마음이 찌릿하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참 꼼꼼히도 안 되는 나 자신이 어쩐지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한 묘한 기분이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끝없이 ‘고치고 싶은 욕망’과 싸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써 내려가는 일이 그렇게 짜릿할 수 없다. 머릿속에 무언가 자동으로 작동하듯, 마치 나만의 챗GPT가 켜진 것처럼 말이다.
문장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비유는 절묘하게 딱딱 맞아떨어지고, 맥락은 매끄럽게 이어진다.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기분 좋은 몰입 상태. 그때의 나는, 내가 쓴 문장을 한두 번 더 읽어보며 참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표현이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니, 하는 뿌듯함. 괜히 혼자서 입꼬리를 올리며, 그래도 나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을 다독이기도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문장은 오래 가지 않는다. 몇 시간만 지나 다시 들여다보면, 아까 그 감탄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문장을 쓴 것도 의미를 표현한 것도 나인데, 내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기분. 글을 쓸 당시만해도 맥락이 완벽하게 연결되어 보였는데, 오늘은 연결은 커녕 어딘가 조악해 보인다.
그럴 때면 고민이 된다. ‘지금이라도 글을 내릴까.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건 아닐까.’ 그 문장이, 그 문단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그저 몇 시간 전에는 그렇게 멋지다고 여겼던 표현들이 갑자기 촌스럽고 과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
처음에는 이미 발행한 글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쳤다. 맞춤법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덜컥 올려두고 나서야 불안해져 다시 돌려보면, 틀린 부분이 무려 150개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창피했다.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일상 속에서 불쑥 떠오르는 문장들을 메모해 두었다가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쓰기도 했다.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글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지만, 막상 정리된 문장들을 보면 뭔가 다르다는 생각. 처음 쓰는 글보다 고치는 글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걸 그제서야 실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블로그 관리에 관한 글이 있었다. ‘블로그에서 가장 안 좋은 습관은 이미 발행된 글을 계속 수정하는 것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뭔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 해졌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당연함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기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읽었을지도 모르는 글을 뒤늦게 전면 수정하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 내가 했던 행동은 누군가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었고, 나의 말과 태도에 신뢰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그제야 깨 달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나름대로 원고를 더 꼼꼼히 확인하고, 맞춤법도 한 번 더 살피고, 마지막까지 문장 흐름을 다듬은 후 에야 발행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그래, 이제는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드는 의문은 그렇게까지 확인하고 발행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다시 보면 ‘이건 다시 써야 해’ 싶은 글이 90%가 넘는다.
참 미스터리다. 똑같은 문장인데, 어제의 나는 괜찮다 했고 오늘의 나는 안 괜찮다고 말한다.
어쩌면 글쓰기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늘 글을 쓰는 나와 읽는 나가 끝없는 욕망과 싸우는 일.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래도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내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일. 그러나 이상하게도, 난 그게 싫지 않다.
포스팅을 마친 후,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조바심을 내려놓고, 아직 더 많이 읽어야 하고,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당장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불안보다, 꾸준히 계속 가겠다는 다짐을 더 단단히 하고 싶다. 글을 쓰는 건 결국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니까.
글을 올리고 나면 댓글과 하트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익숙한 닉네임들이 떠오르면, 낯설지 않은 따뜻함에 괜히 마음이 온기를 느낀다. 방문해주신 분들께 인사를 남기고, 그 분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나눈다. 댓글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나누게 되는 짧은 대화들이 있다. 예전엔 몰랐던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처음엔 혼자 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블로그였지만, 이제는 매일 조용히 찾아와 주는 분들 덕분에 이 공간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 닉네임을 하나하나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그분들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 글을 보는 그분들도 아실 거라 믿는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늘도 ‘계속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조바심을 버리고, 꾸준히, 그리고 진심으로.
오후에 시합이 있는 아내는 오전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볼링장에 가야 하는 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려면 11시쯤에는 나가야 하기에 나는 그 시간 즈음이 되자 자연스레 아내의 동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다 10시 50분쯤, 방문 앞에서 조용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뭔가 촉이 왔다. 이건 단순한 인사나 작별 인사의 톤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예상대로였다.
눈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아내가 그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서 있었다. 흡사 ‘장화신은 고양이’에서 나오는 고양이처럼, 애절하고도 엉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대중교통 타고 가기 싫어.” 이유라기엔 조금 황당한 말이었지만, 아내는 그 한마디로 모든 설명을 끝낸 듯 보였다. 내가 눈치를 챘다는 걸 아는 듯, 태워다 달라는 말을 돌려 하는 중이었다.
나는 책 한 권을 조용히 챙겼다. 무언의 동의. 아내는 볼링공을 챙기고, 나는 책을 챙기고, 그렇게 함께 볼링장으로 향했다.
오늘 새로 펼친 책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수많은 분들이 추천한 자기계발서 분야의 필독서 같은 책이다. 하와이 대저택에서 꼭 읽기를 추천한 바로 그 책의 첫 장을 오늘 펼치게 되었다.
나는 도심 속 주차장, 차 창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빌딩 숲이 만들어 준 그늘 아래에서 펼친 책 한권으로 인해 난 그 어떤 휴양림에서 보다 여유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 않았다. 내용이 어렵거나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저자인 데일 카네기가 독자에게 직접 건넨 첫 문장, 반드시 두번은 반복해서 읽으라는 단호한 부탁 때문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형광펜을 꺼내 들고, 마음에 닿는 구절마다 줄을 긋고,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읽었다. 중요한 문장은 플래그를 붙여가며, 나중에도 꼭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책과 대화를 이어갔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경기가 끝났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낮았다. 따로 묻지 않아도 결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괜한 위로나 무심한 질문 대신, 그냥 조용히 “수고했어”라고 말했다. 함께하신 분들과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는 집으로 출발했다.
오후 6시 즈음, 아내와 집에 가는 길. 그런데 뜻밖에도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퇴근길 교통 체증이라 여겼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곧 도로 곳곳이 평소와는 다른 밀도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며 상황을 깨 달았다. 아, 맞다. 프로야구 개막. 어제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홈경기가 시작되었고,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바로 그 야구장이 있었다.
경기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차량과 인파가 도로를 완전히 삼켜버린 것이다. 생각하지 못한 변수 앞에서, 곧 화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 섞인 짜증이 목까지 차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운전대 위에 내 화를 쏟아내고, 차 안에서 들리지도 않을 욕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차 안을 불쾌함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나는 상황인데도, 나는 그 화를 스스로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지금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이 도로가 뚫릴 리 없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나에게는 중요한 변화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쉽게 놓아버렸을 인내심을, 오늘의 나는 조금 더 오래 붙들었다.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하루였다.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작고도 확실한 증거. 오늘 그 조용한 차 안에서, 나는 그것을 느꼈다.야구장에서 걸어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모자, 푸른 유니폼, 갈색 야구 글러브를 낀 손. 부모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 두 손을 꼭 잡은 연인, 친구들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소년들, 서로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도 어깨동무하며 웃고 있는 친구들까지. 그 풍경은 단지 경기의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면 같았다.
오늘 경기는 삼성이 이긴 모양이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훨씬 더 밝은 표정인 것을 보면, 하지만 오늘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승패를 떠난 공통된 표정이 있었다. 모두가 마치 이긴 사람처럼 보였다. 해맑은 웃음, 가벼운 발걸음, 그 날의 햇살만큼 따뜻한 눈빛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깨 달았다. 누가 이겼느냐 보다, 그 경기 자체를 ‘함께’ 즐겼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목청껏 응원하고, 순간순간에 환호하고, 짜릿한 긴장감을 나누며 봄날의 오후를 보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속에 담겨진 행복을.
그리고 계절이 정말 바뀌었다는 걸, 나는 오늘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단지 기온이나 날씨 때문이 아니라, 거리 위를 걷는 사람들의 에너지, 그 웃음과 행복 속에 나오는 설렘과 열정의 기온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봄은 결국 이렇게 왔다.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 아이의 웃음소리, 익숙한 유니폼, 응원의 흔적을 담은 얼굴들. 길었던 우리 마음의 묵은 겨울을 녹이며, 늦지 않게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그 계절이 돌아왔음을 오늘 그 길 위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늘 하루 볼링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아내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 때문인지 말수가 줄었다. 몸에 남아 있던 긴장과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 피곤함을 더는 숨기지 못하고 조용히 침대로 향했다.
막내의 저녁을 챙기고 책상에 앉아 조용히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은 책을 펼치지 않기로 했다. 빌딩 숲 사이, 그늘진 주차장에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눈이 살짝 피로했다. 봄바람이 차 창으로 스며들며 분명 마음을 환기시켜 주었지만, 몸의 고단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독서는 미뤄두고, 대신 일기를 펼쳤다.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100일간의 목표쓰기를 작성하고 조용히 서재의 등을 끄고 거실로 향했다.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나에겐 마음이 조용히 쌓여가는 하루였다. 그렇게 나는 오늘의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마무리하며, 내일을 위한 공간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