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84일째,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한없이 느슨해지고, 아주 오래된 멜로디가 머릿속을 서성이는 날. 내 안에 있던 무언가 흘러나오듯, 흥얼거리는 되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문득 책상에 앉아 이웃들이 써 내려간 글들을 읽으며 그들의 감정에 살짝 기대어본다. 아마도 따뜻해진 공기 탓일까? 봄이 사람들을 더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감성, 에세이의 이야기들이 오늘 따라 유난히 많이 보였다. 문득 아주 오래된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해바라기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노래의 가사를 입 안에 담고 싶고 귀에 담고 싶어 졌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추면, 행복하라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즐거움에 웃음짓는 나날이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해바라기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스피커에서 해바라기의 노래가 흐르고,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느껴본다. 음악이란 참 묘하다. 한 번의 멜로디로, 한 줄의 가사로, 사람을 단숨에 과거의 어느 장면으로 데려가버린다. 나 역시 그랬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오래전 좋아했던 해바라기의 노래를 따라가 본다.
통기타를 들고 화음을 맞추던 두 사람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들의 음악은 마치 한 편의 시 같았다.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언어들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런 노래였다.
“사랑이에요, 내 마음의 보석상자,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으로, 모두가 사랑이에요,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어릴 적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아르바이트를 해 기타를 샀다. 단순한 충동일 수도 있겠지만, 내 겐 그 시절 가장 진심이었던 결정이었다. 왼손가락 끝이 아프고 물집이 잡혀도, 새끼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해도, 밤마다 코드를 익히며 멜로디 하나에 집중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 어딘가의 조용히 잠들어 있던 노래 가사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었는데, 입은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언제 외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가사들이 입술을 따라 흘러나올 때, 나는 그리운 어떤 과거의 순간을 함께 하게 된다.
이 순간, 내 기억 속의 조각들은 하나 둘 맞물려 들어가며, 오래된 사진처럼 추억이라는 액자 안에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그 모든 감정이 하나의 풍경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좋은 감정으로 마음에 새겨진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같은 온도로 되살아난다. 음악은 기억의 향기와 닮아 있다. 가사 하나, 멜로디 하나에 담긴 감정은 그 순간의 온기까지 고스란히 불러낸다.
나는 어느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던 “사랑으로”. 끝도 없이 반복하며 불렀던 그 노래.
오늘 아침. 창가에서 부드럽게 스며드는 봄 햇살과 함께, 그 모든 장면이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느닷없이, 아무 말없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아주는 것처럼. 그런 따뜻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감성을 최대치로 올려 해바라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운 책을 주문하고, 인간관계론의 중요한 내용을 한번 더 읽고, 메모지에 필사를 해서 벽에 붙여 놓았다. 조금씩 늘어난 메모들이 어느새 벽을 채워가고 있다.
이 하나의 문장들은 내 지식의 벽돌이 되어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의 태풍이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든든한 담이 될 것이다.
감기가 오려는 지 저녁부터 목이 따끔거리는 것이 수상한 기운이 몰려든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 그 수상한 기운을 틈타서 슬며시 다가와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도 무거운데 오늘 운동은 쉬는 게 어때, 그러다 탈나면 병원비가 더 나와!” 그럴듯한 말로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나를 깨 닫는 순간이었다.
물론 예전 같으면 백 번은 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몸은 내가 잘 알 듯 오늘 이 정도의 컨디션은 운동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내면의 내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반복된 의지로 습관된 나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난 변했다.
옷을 갈아입고 웨이트 후 페달에 발을 올렸다. 5분이 경과하고 몸의 달아오르자 땀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땀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웠던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전진해 나아갔다.
오늘 하와이 대저택의 영상은 고명환 작가와 함께 나와 한 권의 책을 소개하며 구독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영상으로 제목은 “하고 만다” 올 1월에 방영된 영상이었으나 나 오늘 이 영상을 처음 보게 되었다.
오늘 두 작가가 나에게 소개한 책은 1913년 앨버트 허버드의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고명환 작가, 하대작가 두 사람 모두 내 독서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임으로 두사람이 함께 하는 컨텐츠는 그 어떤 영상보다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의 내용은 단순했다. 쿠바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스페인과 쿠바를 독립시키기 위한 미국과의 전쟁 중에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매킨지가 쿠바 반군의 장군인 가르시아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받은 로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책 속에 담겨있는 모든 메시지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이 책은 내가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오늘 두 작가의 이야기과정에서 알게 된 책의 한 문장은 바로 이 것이다.
로완중위는 대통령으로부터 가르시아 장군에게 전해줄 편지를 받고 “어느 곳에 그가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작가가 해석한 의미를 내가 여기서 다 밝히면 어렵게 시간을 내서 영상을 제작한 두 작가의 노고와 의미가 퇴색되니 영상을 직접 시청해 보실 것을 추천 드리고 싶다.
오전에 이미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또 한 권의 책을 새롭게 담았다. 그 순간, 아무렇지 않게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예고 없이 다가온 설렘,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소개받고, 주저 없이 '담기' 버튼을 누른 그 찰나의 기분은 어쩌면 아주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건 마치, 자식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어 복잡한 시장 안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엄마의 마음 같았다. 꼭 필요한 재료를 사기 위해 두 눈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중, 우연히 신선하고 값도 착한 재료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마치 운명처럼 손에 들어온 재료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으며, 벌써부터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웃음짓는, 바로 그 마음.
아직 냄비에 불도 켜지지 않았고, 칼도 들지 않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시작하기 전의 설렘과 뿌듯함이 이미 마음 가득 차오르는 것. 책 한 권을 담으며 느끼는 이 감정은, 그러니까 독서가 주는 가장 첫 번째의 선물인 셈이다.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오늘의 나는, 책을 담는 그 짧은 순간에 작은 기쁨 하나를 또 마음속에 조용히 얹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샤워를 하고 나머지 루틴을 정리 후 소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잠시 뒤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확인해보니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퇴사를 해서 현재는 다른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후배라고는 하지만 한 살 차이니 그냥 친구라고 봐도 될 정도의 사이다. 내가 회사를 퇴사한 걸 모르니까, 최소 4개월 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년의 나이에 짊어져야 할 무게가 무거운 만큼 친구들에게 연락한번 해야지 생각하고 들어야 하는 수화기의 무게도 무거워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린 서로 서운해하지 않았다.
안부를 묻던 전화가 결국 나의 퇴사로 주제가 흘러버렸다. 이 주제로 흐르면 모두가 그렇듯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니 대체 뭘 하려고 그 좋은 직장을 때려 쳤어?” 정말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이었다. 음… 글쎄 왜 그만뒀을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의 내 상황이 창피하거나 밝히기 두려워서 가 아니라 이미 내가 대답을 하면 돌아올 상대방의 또 다른 질문과 그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못한 친구가 재촉하듯 보채며 다시 묻는다. “사업 준비해?”
난 단호히 말했다. “책 읽고 글 쓰고 있어!” 친구가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불현듯 찾아온 침묵은 우리 두 사람을 각기 다른 링의 코너로 몰아 놓고 서로에게 카운터를 세듯 우리를 다그친다. 친구는 친구대로 나는 나 대로 숨 고르기를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먼저 기운을 내서 친구에게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농담 같은 말을 했다.
“왜? 책 읽고 글 쓰면 안되나?”
그리고 내게 물었다.
“부럽다. 집에서 논다는 얘기잖아, 돈 많이 벌어 놨나 보네, 그래서 진짜 뭐 할 건데?”
늘 이런 식의 질문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그래서 난 더욱 침묵하게 된다. 이 대화의 끝이 어떤 것이란 것도 잘 알기 때문에 난 오래 시간 끌지 않았다. 친구에게 다시 말했다. “책 많이 읽고 글도 쓰고 나중에는 강연도 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수화기 너머 친구가 쉬는 커다란 한숨소리가 순간 창문이 열린 듯 거세게 내 귀와 빰을 때리는 것처럼 강하게 느껴졌다. “작가? 갑자기 무슨 작가?... 그렇구나, 힘들겠네, 쉽지 않을 텐데, 그래 잘해봐” 우린 더 이상의 긴 통화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친구의 좀 전의 명랑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곧 넉다운이 될 듯한 풀 죽은 목소리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운동으로 가벼워졌던 몸이, 전화 한 통에 다시 무거워졌다. 나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내 안에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남아 있다. 내가 누군가의 시선에 여전히 취약하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이런 전화에 흔들리고 무거운 감정이 든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랜 지인들과 전화나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의 반응은 정확히 둘로 갈린다. 첫번째는 오늘 같은 반응이다. 위로, 측은, 불안, 걱정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한숨 어린 시선들이 보인다. 그리고 두번째는 용기, 의지, 희망이 섞여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실제로 몇 일전 오래전 캠핑을 하던 형님과 통화를 하며 난 절대적인 희망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형님은 위의 똑 같은 나의 대답에 전혀 망설임과 침묵 없이 이렇게 답해주었다. “그래, 맞다 넌 그동안 내가 봤을 때, 잘 할 꺼야, 이제야 길을 제대로 찾아갔네”
두 사람 모두,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건넸다는 걸 안다. 한 사람은 조심스럽게 위로를 담았고, 또 한 사람은 단호한 믿음을 보내주었다.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 질문에 담긴 온도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 그 온도의 차이를 너무도 뚜렷하게 느꼈다.
말이라는 것은 결국, 그것을 내뱉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의미가 완성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상대의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고 만다. 오늘 나는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쪽에 서 있었지만,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달했던 순간엔 어땠을까?
혹시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상처로 남았던 건 아닐까? 나의 말 한 마디, 나의 눈빛 하나가 누군가에겐 의외의 무게로 남았던 건 아닐까? 친구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 짧은 한숨. 그건 단순한 피로의 무게가 아니라, 말로 다 담기지 못한 감정의 여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한숨은 어쩐지, 예전에 내가 무심코 누군가에게 건넸던 시선의 잔상과 겹쳐졌다.
오늘 나는, 내가 던졌던 말의 부메랑을 상처의 형태로 돌려받았다. 비수처럼 날아오지 않았고, 다정한 척 돌아와 마음을 찔렀다. 그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조용한 후회였다.
다음엔,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 더 천천히, 더 깊이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정의 끝에 머물러 있는 그 말 한 줄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늘, 의미가 담긴 채 되돌아온 그 부메랑을 나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부러뜨렸다. 그것은 분노의 반응도, 감정의 폭발도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은, 내가 먼저 상처를 던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다짐이었다.
말이 가진 무게, 시선이 남기는 흔적, 무심한 한숨이 스치는 마음의 결. 나는 이제 안다. 그 무엇도 가볍지 않다는 걸. 그래서 오늘 나는, 내 안의 오래된 습관 하나를 스스로 멈춰 세웠다. 다시는, 어떤 이의 마음을 향해 부주의하게 던지는 일이 없도록.
책상에 앉아 오늘 친구와의 대화를 글로 정리해본다. 수없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 현관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나가보니 아내가 퇴근을 한 것이다. 창 밖은 아직 밝은 데 벌써 퇴근을 하고 시간을 보니 앗! 5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 있었던 나를 발견했다. 세시간이 넘도록 글을 쓰고 있었다. 다행이 오늘은 화요일 볼링장으로 향하는 날이다. 저녁은 볼링을 마치고 먹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볼링장으로 향했다.
볼링장으로 가는 길, 오늘도 삼성의 홈경기가 있는 날인 것 같다. 도로변에 간간히 보이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순간 늘 가던 길로 가는 것은 정체된 도로에 나를 가둬놓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이 들었다. 우회도로를 선택해서 여유 있게 볼링장에 도착을 했다.
아내는 볼링을 치고 난 오늘 낮에 읽지 못한 책을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볼링을 마치고 함께 인근 치킨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해결하고 우린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