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라는 숫자 너머, 각자의 자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마음
금주 86일째, 여전히 몸속에 남아있는 감기기운으로 인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희미했던 달 빛 마저 사라지고 동녘의 햇살만이 가득한 아침 창 앞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어제 생각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비가 내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두 사람의 어수선한 준비가 끝났다. 현관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비로소 나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책상 앞에 앉아 하루의 시작을 준비한다. 책상 위에 어제 도착한 책들의 박스를 조심스레 뜯었다. 새로운 아침, 새로운 책을 여는 이 순간이 이른 아침의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오늘 책은 며칠 전 하와이 대저택에서 인상 깊게 접했던, 나발 라비칸트의 <부와 행복의 원칙>. 강한 페달의 느낌과 함께 내 머릿속을 잠식헀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펼쳤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나발 라비칸트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그가 트위터, 팟캐스트, 인터뷰등을 한 내용을 기반으로 “에릭 조겐슨”이라는 작가가 엮은 책이라는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들은 것은 그렇다면 나발 라비칸트라는 사람이 굉장히 오래전 인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영상에서는 분명 그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음… 일단 책을 읽다 보면 내 궁금증이 해소되리라. 시작도 하지 않고 의문을 갖는 것은 독서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침과 코 막힘으로 인해 완전치 못한 몸상태라 읽는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책의 큰 맥락은 두 개의 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부와 행복. 오늘은 1부인 ‘부’의 챕터만 읽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전히 몸이 완전치 않은 상태였고, 집중력도 그에 따라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기에.
2부의 ‘행복’은 내일, 조금 더 컨디션이 회복된 아침에 천천히 읽기로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하고 싶은 생각 정리도 많았지만, 그 또한 내일로 미뤘다. 억지로 오늘 안에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야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오는 법이고 몽롱한 나의 정신이 오늘은 행복을 가질 상태가 아니므로…
조금 남아 있던 감기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땀을 내기로 했다. 페달을 밟았다. 천천히, 그러나 늦추지 않고. 몸속에 남아 있던 나른함이 조금씩 땀과 함께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오늘은 며칠 전 봤던 영상, 고명환 작가와 하대 작가가 함께 만든 “하고 만다” 2월 제작 영상을 틀었다.
오늘의 책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 불과 얼마 전 셰익스피어의 문장에 혼쭐이 나 멍하니 있던 나를 다정하게 다독여준 인물. 그래서인지, 이젠 에머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스승처럼 푸근하다.
영상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이제는 이름만 듣고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마음 한 켠에서 뭔가 뿌듯한 감정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영상 속에서 두 작가가 책의 내용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독서를 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부럽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책 해설이 아니었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얼마나 깊이 있는 독서와 오랜 사유를 통해야만 그런 통찰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말에 무한히 동의하면서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 모습이 꼭 자동차 앞 유리 밑에 놓인 강아지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위, 아래로. 그냥 말없이. 나도 그랬다. 그렇게 끄덕이고 또 끄덕이며, 감탄을 삼키듯 따라가고 있었다.
책의 제목 자기 신뢰는, 사실 에머슨의 저서<성공의 법칙>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 속에서는 이 ‘자기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 인지 여러 방면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두 작가가 하는 말들이 단순히 귀로 읽히는 것을 넘어, 시각을 통해 머릿속에 이미지처럼 잠시 그려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 속 문장이 머릿속에서 장면처럼 스쳐가는 감각. 예전 같았으면 알지도 못 하는 것들을,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오늘은 왠지 좀 멋져 보였다.
충분히 땀을 흘리고 나서야 몸 안에 남아 있던 감기 기운까지 함께 빠져나간 듯했다. 상쾌함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 개운해진 몸으로 나머지 루틴을 하나씩 마무리한 뒤, 다시 책상에 앉았다.
얼마 전 작성했던 에머슨의 성공의 법칙 후기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다. 물론 바로 옆에 있던 책을 꺼내어 읽을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내가 적은 생각을 보고 싶었다.
비록 같은 책은 아니더라도, 같은 작가가 쓴 글을 두고, 영상 속 두 작가가 했던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비교해보는 것. 그 과정 자체도 독서의 매력이며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
결론은… 비밀로 하려고 한다. ~~
저녁 무렵,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보다는 경북 의성, 안동, 영덕 지역에 이 빗줄기가 더 많이 닿기를 바랐다. 그곳에선 거대하게 솟아오른 불길이 수많은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화마가 집어삼킨 차량들, 하늘을 가르며 끊임없이 물을 뿌리는 헬기들, 화면 속에 펼쳐진 그 장면들은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지만, 그건 분명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었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TV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 나오는 불빛과 헬기 소리에 우리 둘 다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때로 너무 조용하게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는다. 말 대신 내쉰 한숨만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어제 끝난 볼링 대회의 본선 경기를 다시 보았다. 우리가 다니는 볼링장에서 상주하는 프로 선수가 8강에 진출해 경기를 치르는 모습이었다.
경기 방식은 토너먼트였다. 7-8위가 먼저 붙고, 이긴 사람이 6위와, 또 이기면 5위와…
이런 식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 선수는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를 이기고 4위와 맞붙었지만 아쉽게도 패배했다. 결과는 최종 5위.
마치 우리가 직접 경기에 출전한 듯, 손에 땀을 쥐며 응원했던 우리는 결과가 나오자 조용히 TV를 바라보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나는 중계가 끝나고 채널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본선까지 올라갔는데, 대단하지.”
그러자 아내가 툭 내뱉듯 말했다.
“1등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몰라? 1등 아니면 의미가 없어.”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늘 농담처럼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치 삶의 전제가 된 것처럼, ‘1등만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나도, 아내도, 어딘가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아내의 그 익숙한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1등 말고 왜 의미가 없어? 5등이 있어야 1등도 있는 거 아냐?”
순간, 아내가 날 흘깃 보더니 말한다.
“웬일이야? 맨날 1등만 알아준다고 하더니, 사람이 변했네? 이상해~”
그때 문득 나 자신도 멈칫했다. 정말 이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 한마디. “5등이 있어야 1등도 있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그저 “잘했네, 아쉽지만 그래도 본선 갔잖아” 정도로 말했을 텐데, 오늘은 그보다 한걸음 더 들어간, 어쩌면 누군가의 노력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말이 튀어나왔다이건 내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였다. 순위의 높고 낮음보다, 그 안에 담긴 과정과 사람을 더 소중하게 느끼게 된 변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말들이 있다.
“5등도 잘한 거지.” 이 말 속에는 어쩌면 오로지 승부의 결과만이 기준이 되는 시선이 담겨 있다. 다섯 번 째라서 괜찮다고, 어쩌면 위로를 가장한 언어 같은 느낌이랄까. 그 말은 결과만을 놓고 판단하려는 체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5등이 있어야 1등도 있는 거지.” 이 말은 조금 다르다. 그 안에는 순위라는 숫자 너머, 각자의 자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누군가가 최선을 다했기에 그 순위가 의미를 갖고, 그 다름이 함께 존재하기에 비교가 성립한다는 생각. 단순한 표현 하나에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담기고, 듣는 이의 마음에 남는 온도는 그렇게 달라진다.
그리고 문득, 우리 부부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1등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스물여섯이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 아이 셋을 낳고 키우며 누구보다도 ‘성공’이라는 것을 꿈꾸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때 우리는 철없을 만큼 젊었고, 그 젊음은 곧 무모함이기도 했다.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주변의 거의 모든 시선이 걱정과 우려로 가득했다. 부모님들도, 친구들도, 세상조차도.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어쩌면 사랑보다도 강했던, ‘버텨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의 무게가 “1등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어버린 시간들. 뒤처진다는 건 애초에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1등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신념. 그 단단하고 외로운 신념만으로 우리는 살아왔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씩 돌아보게 된다.
나와 아내는 우리가 바라는 삶보다는 부모님이 원하던 방향, 혹은 나보다 능력 있는 친구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며 살아왔다. 늘 옳고 안정적인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건 결국 우리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진 삶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생각했고, 때로는 우리 분수보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며 경쟁적으로 살았던 건 아닌가,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닌, ‘누군가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무심코 내 입에서 나온 한마디. 그 말은 그냥 스쳐간 생각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변화, 내가 나 자신에게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 같았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변화의 느낌.
아마도 나는 지금, 정말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