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85일째, 어제 오후부터 몸이 묘하게 무겁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피로감 같은 것. 저녁 즈음엔 목까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감기가 오려는 느낌. 그런 예감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감기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 잡아야 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상비약을 꺼내 먹었다. 약 기운이 도는지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따끔거리는 목은 쉽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깨고, 다시 눈을 감고, 잠시 꿈을 꾼 듯하다 또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밤이었다.
밤을 뒤척이다 맞이한 아침. 여전히 목은 아팠고 몸은 무거웠다. 창가로 향했다. 기지개 대신 깊은 한숨 같은 걸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일 같은 창인데, 아플 땐 어쩐지 풍경 마저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아침에 약을 한 알 더 삼켰다. 빈 속에 삼킨 약 기운. 거기다 막힌 코까지 겹치니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책상 앞에 앉아도 도무지 집중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자니, 문득 의문이 밀려왔다. 도대체 어디서 감기에 걸린 걸까.
초기 증상이 시작된 게 월요일이라면, 감기의 씨앗은 주말쯤 부터 뿌려졌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요즘 외부 일정은 거의 없었고, 운동도 빠지지 않고 했고,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며 체력을 나름 잘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금요일 하루 종일 외부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기에 걸렸다는 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주말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아, 토요일.
아내의 볼링 경기를 따라갔던 날이었다. 실내 볼링장 내부는 항상 공기의 외부와 전혀 다르다. 땀을 식히기 위해, 그 공간은 늘 선풍기와 에어컨이 동시에 작동 중이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내내 한기를 느끼며 앉아 있었다. 그때는 그저 '좀 춥다'는 감각에 불과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감기의 시작이었다.
좀 억울했다. 나는 볼링을 친 것도 아니고, 최근엔 밤이슬을 맞은 적도 없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니다. 요즘처럼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했던 때도 드물었는데, 1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한 감기에 지금 딱 걸려버리다니.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적어도 그날 조금은 몸을 움직였더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도 아플 거라면, 무언가 했던 게 차라리 나았을까. 괜히 자잘한 억울함까지 느껴졌다.
약기운으로 인해 멍하던 머릿속이 서서히 가라앉고 나서야, 어제 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을 다시 펼칠 수 있었다. 약간의 여운이 남아 있긴 했지만, 책장을 넘기는 데는 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세계문학전집, 이달에만 벌써 세 번째 였다. 막내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고, 정확히 말하면… 그 약속을 내가 먼저 허세 섞인 말투로 꺼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괜히 의기양양했던 말투, 애써 큰소리쳤던 나.
그 부끄러움을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 자격지심 같은 걸 털어내기 위해, 어쩌면 스스로에게 내민 작고 엄격한 벌처럼 셰익스피어의 책을 다시 선택했다.
감히 내 필력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그것도 세계가 인정한 4대 비극 중 하나를 평가한다는 게 쉽진 않다. 혹시라도 셰익스피어가 내 글을 보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쫓아올까 봐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왕은 딸들의 사랑을 시험하고, 딸들은 그 사랑을 이용하고, 아버지는 가장 사랑했던 딸을 내쫓는다. 형은 쫓기고, 동생은 속이며, 권력과 욕망이 사람들을 조각조각 찢어놓는다. 두 딸들은 한남자를 사랑하고, 읽는 내내 “이보다 더 꼬일 수 있을까?” 싶은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고,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남았다. 그때는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면, 지금은 소통의 부재가 만든 참혹함에 더 깊이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동안 비극이라는 걸 ‘죽음’이나 ‘슬픔’ 같은 결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리어왕>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비극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소통의 실패, 자기중심적 인 판단, 외면된 진심…
이 모든 것이 진짜 비극의 본질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6명이 죽고, 리어왕에서는 7명이 죽는다. 하지만 단순히 몇 명이 죽었느냐가 비극의 깊이를 결정하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 사랑, 알아보지 못한 진심, 끝내 닿지 못한 마음. 그 비극은 누가 죽었는가 보다 훨씬 더 깊게 사람을 울린다.
리어는 결국 깨 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코델리아는 끝까지 사랑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덮고 나니, 셰익스피어가 왜 작품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난 뒤 에서야 진실을 드러내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적당한 충격으로는 고집도, 오만도, 자기중심적 인 사고도 바뀌지 않는다. 그걸 셰익스피어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끝까지 몰아붙이고, 모두가 무너진 뒤 에야 조용히 깨달음을 꺼내 보이는 것 같다.
오늘 나는 한 권의 고전 속에서,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어쩌면 지금의 우리와 별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막내와의 약속도 지켰다. 조금 부끄럽고, 많이 배운 하루였다.
세계문학전집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늘 그 뒤에 덧붙여진 작품 해설이 있다. 번역을 맡은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담은, 일종의 주관적인 독후감 같은 글이다. 누군가는 그걸 생략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부분까지 함께 읽는 걸 고전 읽기의 하나의 매력으로 느낀다. 한 권의 책 안에서 두 번 감정이 일어난달까. 하나는 나의 것이고, 또 하나는 낯선 누군가의 것이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책과 더 오래 머물게 만든다.
작품 해설을 읽으며 내가 그 감상에 동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 해설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해설 역시 한 사람의 감정이고, 그 사람 또한 ‘독자’로서 작품을 마주한 것일 뿐이니까.
작품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또는 글의 말미에 해설을 남겼다는 이유로, 그 감상이 ‘정답’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태도에 조심스러워진다. 독서란 본래 정답이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상에 점수를 매기듯 평가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독서 태도를 흐리게 만드는 위험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인의 감상 위에 선을 긋는 게 아니라, 그 다름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같은 문장을 읽고도 다르게 느끼는 그 간극이야말로,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시계 바늘이 어느새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운동을 할 시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익숙한 고민이 있었다. 특별한 것도 아니다. 늘 반복되는 그것. 특히 오늘처럼 감기로 몸이 무거운 날엔 더 쉽게 떠오른다.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무력감은 내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몸이 아플 때, 마음도 함께 눌리게 된다. 움직이기도 싫고, 생각은 더 무거워진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아마 그 무력감에 잠시 기대 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고민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처럼, 무거운 몸에서 땀을 짜내기로 마음먹었다. 아프다는 감각을 땀으로 밀어내듯, 고요히 이겨내보기로 했다. 의지가 강해서라기보다, 이 무기력의 늪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처럼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오늘 시청한 영상은 남혁우원장의 <달리기의 모든 것>이란 책의 영상이었다. 책 제목 그대로 달리기를 통해 삶을 바꿔나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달리는 행위를 통해 체력을 키워 운동선수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달리기를 행위로 보지 않고 사고 전환의 핵심 키포인트의 관점에서 보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늘 영상에서 배운 책 속의 핵심문장은 이렇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 자체로 유익한 운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일매일 달리며
나의 목표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걸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든다.
어제의 내가 가진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어제의 나이기 때문이다.
하와이 대저택
이 말은, 요즘의 내가 매일같이 페달을 밟고 있는 그 이유였다.
아니, 어쩌면 어제와 오늘처럼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페달을 밟고 있는 이유를 하대 작가가 나보다 먼저, 더 명확한 말로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당신이 지금 땀 흘리며 페달을 밟는 이유는 바로 어제의 당신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재생하기 전, 나는 습관처럼 아무 정보도 보지 않는다. 오늘은 어떤 영상을 볼까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운동 시간과 비슷한 길이의 영상을 찾아 무심히 클릭할 뿐이다.그런데 그렇게 무심히 선택한 영상 속 내용이, 자주 나의 그날 상태나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너무 자주 찾아온다.
물론, 내가 요즘 자주 하는 생각들이 하대 작가의 말들과 겹쳐서 일 수도 있다. 그의 말들이 내 내면 어딘가에 이미 자리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결을 닮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여전히 신기하고 묘한 경험이다.
특히 오늘처럼 몸이 무겁고, 운동을 왜 해야 하나 자문하게 되는 그런 날에는, 이런 영상이 마치 누군가 내게 건네는 정확한 ‘처방전’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 영상은 내게 말해준다. 지금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운동을 하는 건,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
지금 이 순간, 페달을 밟는 내가 어제의 나를 조금이라도 넘어서기 위한 아주 사적인 노력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다시 힘을 낸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문장일지 몰라도, 나에겐 오늘 하루를 버텨내게 해주는 커다란 에너지가 된다.
어떤 말은 그렇게, 삶을 아주 조금 앞으로 끌고 가는 힘이 된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클릭 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순간이 된다.
달아오른 몸 때문인지 높인 강도 덕분인지 평소보다 많은 땀을 쏟아내고 샤워를 한 뒤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킨 뒤 청소를 했다. 혹시 모를 내 몸속의 감기기운을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버리기 위함도 함께…
뜨거운 커피한잔을 마시며 리어왕에 대한 느낌을 적어 내려갔다.
아내가 퇴근한 후 함께 저녁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켰다. 올해는 될 수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요즘처럼 안타까운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는 날엔 그 다짐도 쉽게 흔들린다.
산불.
해마다 들려오는 소식이지만, 이번엔 유난히 인명 피해가 크고, 오늘은 진화 작업 중이던 헬기까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싹 마른 산, 거센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는 불길, 그리고 그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하는 이들의 절망을 떠올리면, 안타까움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화면을 보며 마음으로만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에 가슴이 더 아려왔다.
이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닐 확률이 크다. 무심코 피운 작은 불씨 하나가 수백 년 지켜온 자연을,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허망하게 집어삼켰다. 더는 그런 어이없는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를. 정말이지, 더는.
그래서 내일부터는 명상을 하며 기도해볼 생각이다.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하늘이 내 마음을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꽤 잘 들어주셨으니까. 조금은 철없는 소원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에.
오늘은 아내에게 막내를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아직은 무게가 나가는 내 몸을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눕히기로 했다.
가슴은 여전히 불편하고 어지럽지만, 그 마음을 담아 오늘은 조금 더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