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운들의 연속, 삶의 행복은 멀리있지 않다.
금주 80일 째, 명상을 마치고 나면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둠과 빛이 맞닿은 그 잠깐의 순간이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기대감과 약간의 쓸쓸함이 동시에 스며든다.
아내와 막내가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도 조용히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나름 분주한 하루다. 이런 날은 한 달에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기에 마음가짐도 조금은 다르다. 외식이거나, 가끔 즐기는 볼링이 아닌 이상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외출할 때면 미뤄둔 일정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게 된다.
한 달에 단 두 번의 외출이라니,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런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 바깥에서 숨 쉬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 당연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고 있었는지 새삼 놀랍다. 몸을 아끼는 법, 시간을 쓰는 법, 그리고 마음을 돌보는 방식을 이 조용한 변화 속에서 조금씩 배우고 있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다섯 군데. 지원센터, 자동차 검사소, 병원, 은행, 그리고 군마트. 빼먹을 수 없는 일정들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구를 지나는데, 동쪽 하늘에서 내려앉은 햇살이 눈앞을 환히 비췄다. 그 따가운 빛에 눈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매일 새벽, 창가에서 조용히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던 그 햇살이 맞나 싶었다. 그렇게나 부드럽고 조심스럽던 빛이 오늘따라 이렇게나 확신에 차 있다니. 겨울의 고집이 완전히 물러간 듯, 봄의 기운이 맑고 선명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또하나의 봄 소식은 바로 목련이었다. 늘어선 차들 앞에 목련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봄은 이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의 외출 그리고 봄을 알리는 목련의 모습까지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봄이라는 계절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단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오늘 또 새삼 느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익숙한 앱을 열어 이웃들의 글을 하나하나 읽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용히 바뀐 일상 중 하나는, 바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늘 운전이 기본이었다. 빠르고 익숙하고, 내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운전대 앞에 앉는 순간 세상과 단절되곤 했다.
오로지 도로 위, 차들의 흐름에만 집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지하철을 타면 그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온다.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웃의 문장에 마음을 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도 자동차 검사와 마트 방문이라는 일정이 있었기에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차를 끌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지하철을 선택했다. 이 선택 하나로 오늘 하루의 리듬이 달라졌다.
평일 오전의 지하철은 한산했다. 복잡하지 않은 공간에, 넉넉한 자리에 홀로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습관처럼 유튜브로 향하던 손길이 이제는 브런치와 블로그를 연다. 익숙해지기 시작한 이 루틴이 어쩐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들이 들려주는 일상의 속삭임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짧은 댓글로 내 마음을 건넸다. 문득 든 생각은 내 글을 찾아와 시간을 나눠주고, 마음을 나눠주는 이들이 있어서 나는 요즘 이런 일상이 더욱 소중해졌다. 그러니까, 매일 쓰는 글도, 오랜만의 외출도, 이렇게 찬란한 봄도.
이것은 분명 내 안에서 일어난, 꽤 큰 변화의 장면이라는 것을.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글을 읽던 중, 휴대폰 화면 한쪽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문자의 발신자는 교보문고. 순간 ‘또 광고구나’ 싶었다. 요즘은 정말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 배달, 은행, 커피, 보험 등 어디서 내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를 곳들로부터 정체불명의 쿠폰이 쏟아진다. 마치 “이건 진짜야!”라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이제는 그마저도 식상한 진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당연히 삭제하려 했다. 그런데 ‘교보문고’라는 단어에서 아주 잠깐, 묘한 끌림이 일었다. 워낙 내가 좋아하는 이름 아닌가. 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의식이 반응하는 요즘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열었다. "만원 쿠폰"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천원도 아니고, 만 원이라니. 그럼 얼마나 사야 이 쿠폰을 쓸 수 있다는 건가 싶어 또 의심을 품고 링크를 눌러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참여한 행사에 당첨되어 받은 쿠폰이었다. 너무도 쉽게 스쳐 지나갈 뻔한 그 한 통의 문자. 작은 기쁨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 별다른 예고 없이 조용히 찾아온다. 괜히 혼자 웃음이 났다. 이런 소소한 운이 내게도 찾아왔다니, 그 과정을 잠시 되새겨 보았다.
예전엔 주로 옥션에서 책을 구매했다. 손에 익은 플랫폼이라 별다른 고민 없이 이용하곤 했지만, 최근 들어 책을 고르고 사는 일이 내 일상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서 자연스레 구매처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무래도 책 구매량이 늘다 보니, 교보문고의 서점다운 시스템과 구성은 그런 점에서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플까지 설치하게 됐다.
어느 날, 2주 전쯤이었을까. ‘챌린지에 참여하세요’라는 팝업이 하나 떴다. 무심코 눌러보니, 내 독서 인생에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해준 채사장의 이른바 ‘지대넓얕’ 시리즈를 대상으로 한 챌린지였다. 2주 동안 정해준 부문을 읽고,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 문장을 써보는 형식이라고 했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지대넓얕은 1권부터 무한편, 그리고 0편까지 이미 완독한 책들이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정보의 책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하나 더 열어준 고마운 시리즈였다. 그렇게 아무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챌린지를 통해 내가 읽었던 문장들이 다시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살아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3월 4일부터 시작된 그 챌린지는 사실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매일 내가 좋아하는 문장을 하나 등록하고, 그에 대한 짧은 느낌을 적는 것. 늘 곁에 두고 펼쳐보던 책이었고, 그 안에 꽂아둔 플래그들을 다시 들춰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조용히,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듯 참여했다.
큰 의미나 성취감보다는, 익숙한 문장들이 다시 마음에 스며드는 감각이 좋아서였다. 그렇게 2주간의 챌린지는 3월 17일에 마무리되었다.
이벤트 상품은 교보문고 기프트카드 만 원권. 추첨으로 100명을 뽑는다고 했다. 천원이든 만원이든 금액 자체보다, ‘100명’이라는 숫자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이벤트 참여자 수를 확인해보니 평균적으로 5,000명 가까이 되는 듯했다. 50:1의 확률. 뭐, 그저 참여에 의미를 둔 거지, 당첨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그 믿기지 않을 확률에 내가 당첨이 되었다.
소소한 보상이 오늘 또 하나 내게로 다가왔다. 특별하지 않고, 큰 무게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엇보다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조금씩, 조용히 주어지는 보상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웠다. 어떤 과정을 통해 내가 당첨이 되었는지는 솔직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내가 이 챌린지에 관심을 가졌고, 참여했고, 마음을 담았다는 것이다.
독서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서점 어플을 설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팝업을 귀찮다고 닫아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는 행위 자체가 나를 조금씩 바꿔 놓았기에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뜻밖의 행운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얼마 전 고명환 작가의 <고전이 답했다>를 읽으며,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고 싶어 따로 적어둔 문장이 있다.
“행운은 기회가 준비를 만나는 것이다.”
오늘 이 문장이 마치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어 내 앞에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냥 문자 하나였는데, 내 마음에 오래도록 그 문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문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크게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옆자리에 계시던 분이 조용히 자리를 옮기는 걸 보니 아마 속으로 ‘이상한 놈이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요즘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사소한 웃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유연한 마음으로 업무를 마쳤다. 돌아와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인근 정비소 겸 검사소로 향했다. 오전의 일정이 매끄럽게 흘러간 덕분인지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과 겹쳐 있어 정비가 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2층 휴게실로 올라갔는데, 그 순간 조금 놀랐다. 기대 이상이었다. 여느 대기업 정비소의 휴게 공간 못지않은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안마의자 두 대와 한 켠엔 골프 퍼팅 연습 설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스킷과 과자가 놓여 있었고, 커피는 블랙부터 믹스, 심지어 건강음료까지 취향대로 고를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시원한 음료수와 건강음료까지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무료라는 것이다.
동네에 이렇게나 잘 갖춰진 정비소가 있다는 걸,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니.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그동안 대체 뭘 보며 살아왔던 걸까. 내 주변에 있던 것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놓친 채 살아온 건지, 아니면 그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건지. 생각해보면 둘 다였던 것 같다. 바쁘다는 이유로, 익숙하다는 핑계로 늘 똑같은 길 만을 선택해온 내 삶이 오늘에서야 조금 부끄러워졌다.
계란과 두유를 먹여야 하는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떠올랐다. 공짜로 준비된 간식 앞에서 난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뜨거운 원두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이것저것 담긴 비스킷을 한 입씩 깨물며 글을 읽었다. 이 조합은 꽤나 이상적인 오후의 풍경이었다. 작은 사치를 누리는 듯한 기분, 그조차도 무료라니. 삶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그런 흔한 말이 이토록 실감 난 적도 오랜만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나 친절한데, 정작 그 친절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건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걸. 오늘 나는 그것을 아주 따뜻하고 달콤한 방식으로 다시 한 번 배웠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내 차 번호를 호명하는 분께 갔더니 올해 검사 규정이 변경되었다는 정보를 상냥한 목소리로 안내해주시는 분의 친절함에 다시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올 해부터 변경된 검사 규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기존: 검사 유효기간 만료일 전 31일, 후 31일이내
변경: 검사 유효기간 만료일 전 90일, 후 31일이내
참고로, 나는 정비업체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받은 배려를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순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시 대구 동구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은 방문해보시기를 조심스레 추천드리고 싶다.
광고도 아니고, 무슨 협찬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냥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위치는 반야월역 인근, ‘혁신자동차정비소’라는 곳이다. 이름 그대로, 낡은 하루에 작지만 확실한 혁신을 선물해줄지도 모른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곧장 군 영외마트로 향했다. 부사관으로 근무 중인 아들 덕분에 드나들 수 있는 곳. 예전에는 이곳에 들어설 때마다 ‘역시 군마트지’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 기대가 살짝 무색해질 때가 많다. 가격이 이전만큼 싸지도 않고, 무엇보다 평균 30분 이상 대기를 각오해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물건을 들고 나올 때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이마트가 더 싼 거 아닐까?”
그래도 꼭 필요한 생필품 몇 가지는 이 곳에서만 구할 수 있으니, 그것만 챙겨 담고는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길, 은행에 잠시 들렀다. 앗!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화면에 뜬 대기 인원 숫자를 보자마자 이건 오래 걸리겠구나. 그럼 병원을 먼저 다녀오자. 하고 바로 방향을 틀었는데, 병원에도 창구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결국 병원과 은행 업무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여유가 있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넉넉한 시간에 다시 찾아오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향했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 3시를 훌쩍 넘긴 시각. 바쁘게 움직였던 하루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피로를 호소했다. 운동으로 사용하는 근육과 일상에서 움직이는 근육이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은 그 말이 참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운동으로는 잘 쓰지 않던 근육들이 여기저기서 조용히 항의하는 듯한 느낌. 그래서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숨을 골랐다.
다행인 건, 오늘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 것만으로도 어쩐지 하루의 무게가 절반은 가벼워진 듯했다. 이유는 딸이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저녁 시간 비워두세요"라며 몸소 말씀하신 걸 보면, 이건 거의 스케줄 확정 공지 수준이다.
요즘 딸은 어지간한 연예인보다도 더 바쁘다. 어쩌다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그런 귀한 손님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따로 내어 집으로 온다고 하니, 오늘 저녁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대기’하는 쪽이 맞다. 딸이 오랜만에 함께 먹자며 고른 메뉴는 다름 아닌 뭉티기(일명 생고기). 며칠 전부터 이 메뉴를 은근히, 그러나 꾸준히 어필해왔기에 식당까지 예약을 해두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막내. 이제 막 고3이라는 낯설고도 무거운 생활을 시작한 녀석이 오늘 지난 한주의 피로를 고기로 풀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 태세는 심상치 않았다. 이미 몸은 단디 준비되어 있었고, 얼굴엔 ‘고기로 인생 회복’이라는 표어가 써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사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막내의 식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다. 소고기를 먹으러 간다면, 그것은 단순한 외식이 아니라 지갑에 구멍이 뚫리는 프로젝트와 다름없다.
더욱이, 이 녀석은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맛의 차이를 굳이 두지 않는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소고기를 먹이느니 돼지고기를 두 번 먹이는 게 나은,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단 막내가 고기를 먹는 것이 아까워서 드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 단지 그저, 그 거대한 흡입력 앞에서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갈 뿐이다. 마치 가을 추수철, 트랙터가 익은 벼를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풍경처럼, 막내가 고기를 흡입하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찰나,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데이터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상황, 취향, 비용, 감정까지 고려된 하나의 절충안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그 순간 나의 뇌는 챗GPT가 되어 있었다. 실시간 분석, 자동 요약, 대안 제시까지. 이 상황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은 단 하나였다. 이제 남은 건, 그 해결안을 어떻게 자연스럽고도 설득시키느냐였다.
결국 오늘 저녁은 선약의 우선순위를 존중하기로 했다. 딸이 먼저 약속을 잡았으니, 뭉티기는 딸과 먹는 것으로 결정했다. 막내의 저녁은 어제 끓여둔 김치찌개로 해결하기로 했다. 물론, 그 대신이라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내일 저녁, 인근 삼겹살집으로 막내를 데려가 마음껏 고기를 먹게 해주는 것. 이 절충안에 대해 딸도, 막내도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이 단순한 결정 하나로 내 지갑에 생길 뻔했던 커다란 구멍 하나를 가까스로 메울 수 있었구나 하고. 그러나 그 마음 한편 뒤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씁쓸함이 있었다. 아무리 현실적인 결정이라 해도,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고기 한 끼 마음껏 사주지 못한다는 자책감. 분명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고, 모두가 웃으며 결정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무거웠다.
딸과 함께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이른 저녁에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은 곳이다. 부부내외가 운영하는 곳으로 동네에서는 오래된 생고기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물론 식당이 크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생고기가 워낙 싱싱하다. 평일에는 생간과 천엽이 무한리필되는 곳이라 손님들이 많은 곳이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귀한 자리, 그 시간을 조금 더 따뜻하게 채워주고 싶은 마음에 딸을 위해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예전 같았으면 둘이서 기본 소맥 포함해 네 병은 가볍게 비웠을 텐데, 오늘은 딸 혼자 소주 한 병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나도 함께 마시고 싶었지만, 난 술을 끊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주 앞에서 딸 혼자 술을 마시게 하는 건, 뭔가 안주와 딸에 대한 미안함이 생겨났다. 그래서 살짝 눈치를 보며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인근 편의점으로 다녀왔다. 하이트 제로 0.00(무알콜 맥주). 다행히 단골이라는 이유로 사장님도 흔쾌히 웃으며 허락해주셨다.
아내와 딸, 그리고 나. 셋이서 오랜만에 사소하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딸은 요즘 재미있게 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그렇게 슬펐다며 꼭 보라고 했고, 프로야구 개막전도 보러 간다고 했다. 좋아하는 그룹의 공연도 예매해 두었고, 타투도 하나 더 추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역시 딸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바쁘고, 훨씬 더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아빠, 엄마의 조용한 저녁 식사 자리에 시간을 내어준 딸이, 정말 고마웠다. 오늘 이 자리는 그저 식사 한 끼를 함께 한 것 이상의 의미였다.
그렇게 딸과의 즐거운 식사와 대화의 시간을 마치고 계산은 내가 했다. 난 궂이 부르지 않았는데 내 돈 써가며 함께 해줘서 감사함을 전하는 이 순간 난 생각했다.
아!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부의 행복이구나. 베풀면서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