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기억들, 돌아오는 삶
비가 씻어준 하루, 돌아오는 기억 그리고 제거한 인공호흡기
어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를 만나러 갈 하루를 잘 버티기 위해서라도 잠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뒤척였다. 머릿속에는 그녀의 모습이 가득했고,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몇 시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잠들긴 했던 모양이다. 막내가 방에 들어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평일이라 늘 그렇듯 아침이 되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눈을 뜬 순간부터 몸이 무거웠다. 피로도 있었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불안과 초조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눈을 뜬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기도부터 시작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그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게 해 주세요. 그녀가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나서야 새벽부터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평소 같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각이었겠지만, 오늘은 그 비가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었다. 이 비는 내 마음속 혼란과 고통을 씻어주는 비였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지난 며칠간의 불안과 두려움, 고통의 흔적을 이 빗줄기가 깨끗이 씻어낼 것이라고. 이 비는 단순히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씻어주는 신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병원의 대기실에 앉아 다시 기도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오늘 그녀를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가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같은 말을 되뇌었다.
11시 20분. 24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나를 반기는 눈빛을 보냈다. 어제보다 훨씬 또렷한 눈동자, 그리고 어딘가 평온해 보이는 표정. 인공호흡기도 제거되어 있었다. 어제의 불안정하고 초조한 모습은 거의 사라진 듯 보였다. 딸과 대화를 나누며 가끔 웃음까지 보이는 그녀를 보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딸이 엄마한테 부탁한 게 있어서 그거 열심히 했어.”
그녀가 딸에게 말했다.
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여전히 가족을 생각하고, 딸을 위해 무언가를 기억해두려 했다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나를 보며 물었다.
“우리 같이 왔는데 왜 나만 여기 있고, 당신은 멀쩡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혼수상태에서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마 그녀는 그때 나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우리가 함께였다고 느꼈을 것이다.
첫째를 보며 그녀는 웃었다.
“언제 나왔어? 멋지네, 군인 같아. 언제 들어가?”
그리곤 덧붙였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는 괜찮아. 지금 나가도 돼.”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혼미했지만, 어제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큰 변화였다. 그녀는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는 듯했다. 가족, 어머니, 후츄, 볼링… 그녀가 사랑했던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마치 기억 속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 같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너무 고맙게 느껴져. 사랑해.”
그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그녀의 손과 발을 묶은 장갑과 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머리에 삽입된 관이 빠질 위험이 있어 풀어줄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그녀가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할지 상상하며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면회가 끝날 즈음, 그녀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도 가면 안 돼?”
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오늘은 안 되고, 며칠만 더 있다가 같이 가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일 또 올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도 올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줘.”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장난스럽던 눈빛까지도 돌아와 있었다. 나는 2월 1일 저녁, 행복했던 그날의 그녀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원을 나오며 이곳에 행정실에 근무하시는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형님은 “이 병원이 뇌 환자 치료에 빠르게 대처하기로 유명하다”며 “정말 천운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신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오늘 하루는 길었지만, 비가 내리던 새벽처럼 내 마음을 씻어주는 하루였다. 그녀의 나아진 모습은 내게 기적이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기도를 마치며 내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더 나은 모습으로 웃으며 맞아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괜찮아?” “그 사람은 어때?” “조금은 나아진 거지?” 걱정 가득한 목소리와 문자들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 진심이 담긴 염려와 관심이 고맙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락이 올 때마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녀가 쓰러졌던 그 순간, 병원으로 달려갔던 긴박한 시간, 의료진의 차가운 설명, 그리고 내가 했던 그 모든 결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설명해야 했다. 그녀의 현재 상태와 나아진 모습,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위험들까지. 마치 영화를 되감듯이 기억을 되새기며 말로 풀어내야 했다. 그 과정은 나를 다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몇 번의 연락을 받고 난 뒤, 나는 조용히 부탁을 전했다. “지금은 연락을 조금만 자제해 주세요.” 이 말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부탁을 하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걱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다시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그녀를 돌보는 것 외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저 이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사무실로 향했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텅 빈 사무실은 고요했고,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적막감이 온몸을 감쌌다. 이렇게 익숙한 공간에서마저 나는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의 시간들이 어쩌면 너무 평범했기 때문에, 이제 그 평범이 더욱 절실해졌다.
가방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담으며 생각했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고, 나는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다.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무겁고 긴 것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그녀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작지만 확실한 희망을 주고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집에 들어서자,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 있었다. 고요한 집 안에서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많은 걱정과 위로의 메시지, 그 속에서 다시 떠올린 아픈 기억들, 그리고 그녀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감사함까지.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오늘도 무사히 그녀를 만났고, 조금씩 나아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내일도 기다려야 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나는 그 기다림 속에서 조금씩 희망을 쌓아갈 것이다. 그녀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 거라는 믿음으로, 긴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했다.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