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짧은 하루의 기록
그녀를 위해 기도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벽 3시. 여지없이 눈을 떴다. 이 시간은 내게 슬픔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약한 시간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천장만 바라보며 다시 눈을 감으려 애를 써봤지만, 머릿속은 이미 깨어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이 시간은 내 생각들을 더 크고 선명하게 증폭시켰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생긴 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속 같은 질문이 되뇌어진다.
머릿속에서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는가. 내 중심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위해서만 선택했던 순간들이 수없이 떠올랐다. 그녀를 위해 살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나를 조여왔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다.’ 나는 그렇게 자책했다. 이제부터라도 그 업을 갚아나가야 한다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뒤척이다 결국 잠시 잠들었을까?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흐릿한 기억속에 남아있는 잔상은 인공호흡기, 폐렴, 합병증, 죽음, 살인자 등등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뿐이었다. 그러다 한편으론 잠시나마 의식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비난했다. 나는 잠들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아픈 몸으로 밤을 버텨냈을 텐데. 이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운가.
몸을 일으켜 앉아 기도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이여.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습니까?”
매일 되풀이되는 질문이었지만,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이 순간에도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깨닫고 있다면, 그것이 답이 아닐까.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이여.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애원했다. “제발, 그녀를 살려주세요. 그녀가 건강하게 돌아와 다시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수십 번 되뇌며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나는 3일째 아침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 처형에게 전화가 왔다. 설 명절에 내려와 음식을 준비하겠다는 따뜻한 제안이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나중에 그녀가 일반 병동으로 옮기면 도와주세요.” 그 제안과 걱정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들에게 아침을 준비하며 괜히 조급한 마음에 “빨리 서두르라”는 말을 쏟아냈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나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말투에 아이들이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나는 금세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미안함조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를 보면 웃어야 해. 울지 말고 위로해 주자.”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이 이미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 면회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기도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이여.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응급실의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병실로 들어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자고 있어?”라고 물으니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왔어?” 짧게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마움에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 앞에서만큼은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꾹 참으며 말했다.
“고마워. 정말 잘해줘서 고마워.”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군인인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들, 얼굴 좋아졌네. 이젠 정말 군인 같아.”
그러고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휴가 나왔는데 엄마가 아프니, 아빠랑 함께 맛있는 거 사 먹어요.”
그녀의 몸은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우리를 먼저 생각했다.
막내를 보며 “막둥아.” 하고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빛처럼 우리를 감싸는 듯했다.
“자기야 그런데 왜 나만 여기 있어?”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이 싫다는 마음을 돌려 표현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정말 고마워. 당신이 이렇게 있어줘서 내가 살아.”
면회 후 담당 의사를 만났다. 그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경과가 좋다는 말이었다. 뇌압도 많이 떨어졌고, 혈관도 잘 봉합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아주 만약에 이 상태로 합병증만 없다면 이주일 내로 일반 병동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나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병원을 나서며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요즘의 나는 매일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저녁에는 아이들과 인근 식당을 찾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종업원이 "몇 분이세요" 하는 말에 나는 생각 없이
“5명이요.” 하고 대답을 했다.
딸이 "아빠 우리 4명이에요"라는 말이 낯설고 아팠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5명이요.”라고 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그녀가 없는 이 빈자리는 내게 가슴 아픈 현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주문한 음식을 가져오신 사장님께서 우리에게 건넨 한마디에 우리 모두 아니 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사모님이 같이 안 오셨네요".....
어떤 맛에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빨리 식당을 나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갑자기 사장님께서 던진 한마디에 속이 안 좋아 도저히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먹으라고 하고 난 잠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들어오니 아이들이 식사를 마쳤다고 했다. 내 마음을 아는 듯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했다.
오늘 하루는 길고도 고통스러웠지만, 희망이 담긴 작은 빛이 보이는 날이었다. 나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될 것을 믿는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이여. 감사합니다. 내일 그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덜 답답했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희망적일 것이다.
그녀가 다시 웃으며 우리 곁에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나는 또 기도한다.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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