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밀려든 초여름 햇살과 방 안에 들어온 바람을 느끼며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유난히 습도가 높은 공기가 어제 내린 빗물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입과 코를 통해 가슴으로 밀려 들어오는 착각을 주었다. 그리고 존 소포릭의 <부자의 언어>를 다시 영상으로 접했다.
“막상 역경의 한가운데 놓이면 지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경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혹시 지금 힘든 상황에 처해 계신가요? 재정적으로 혹은 삶의 방향에서 큰 벽을 만난 기분이 드나요? 쉽호흡을 하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요. 이 역경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하와이 대저택 제공
역경.
역경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힘든 상황, 위기, 혹은 좌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통과해야 할 관문’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역경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역경이 들고 있는 ‘질문’을 읽어내려는 시도로 전환시킨다.
역경을 회피하거나 견뎌야 할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태도. 이것이 존 소포릭이 말하는 ‘부자의 언어’ 속 핵심이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단지 신체의 고장이 아니라, 삶 전체가 다시 조율되어야 하는 중대한 전환점에서 마주한 벽이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저 두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마음이 안정되면서, 문득 이 역경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이제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자,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역경은 겉으로는 고통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배울 것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속도였다.
병은 내 삶의 속도를 강제로 낮추었다. 이전의 나는 속도가 곧 능력이라 믿었다. 빠르게 결정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빠르게 결과를 내는 삶이 성취라고 여겼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가 지나가는 속도가 달라지고 아침과 밤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이전에는 빠듯한 일들로 덮여있던 날들로 인해 분주했던 일정표가 수많은 여백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이 느린 시간이 너무 불편했다. 조급함은 내 마음을 더 옥죄었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도 모르게 새로운 감각이 살아났다.
그렇게 느린 시간 속에서 나는 오래된 감정들을 다시 만났다. 미뤄두었던 고마움, 지나쳐온 사소한 후회들, 그것들은 빠른 속도 속에서는 도무지 만나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내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계기였다.
지금 나는 이전보다 더 느리게 살아간다. 빠름을 자랑하지 않는다. 더디게 걸어도 좋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내린다. 그렇게 느린 속도 안에서 삶은 깊이를 얻고 나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중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닌, 느리게 안으로 스며드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진짜 회복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역경은 주변의 풍경도, 눈앞의 장애물도 무시한 채 고속질주를 이어가던 내게 속도를 줄이라고 경고하는 단속카메라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멈추라는 명령이 아니라, 지금 이 속도로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조용한 알림이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쳐온 길 위에 남아 있던 작은 감정들. 무심코 지나온 사람들의 눈빛. 오래전부터 내 몸이 보내고 있던 신호들. 그 모든 것들이 역경이라는 플래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역경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멈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다. 이제 나는 이전처럼 무조건 앞으로만 달리지 않는다.
때때로 멈춰서고, 속도를 줄이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나는 오늘 ‘역경’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역경은 과속하는 나의 삶에게 속도를 줄이라는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