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격주 화요일, 그러니까 한 달에 두 번
오전 9시 40분.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하던 일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홀린 듯 집을 나선다. 문득 지금 내 모습이 궁금하다. 너무 추레하진 않을까? 먼지 없는 옷을 괜히 한번 털어본다. 손가락을 빗 삼아 슥슥 머리카락도 쓸어내린다.
수도 없이 반복되어 모든 것이 예측 범위에 있다.
가는 길, 이동 동선, 소요시간..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 동요하지 않고 뒷수습을 할 수 있도록.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우리 마을은 살림하는 주부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다. 걸어서 700미터 범위 이내에
대형마트가 1곳, 중형마트가 2곳이 있고 전통시장도 있다.
이 알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 당장 대형마트에 가야 한다고 알려주며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다.
우리 마을의 대형마트는 지역상권과의 상생을 위해 격주 수요일마다 휴점 해야 한다. 그래서 해당 휴일의 전날에는 소비기한이 3일 이내로 남은 모든 물건을 세일가로 판매한다.
유제품, 껍질로 보호된 과일, 양념육, 어묵과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가공식품이 나의 타깃이 된다.
만약 그 시간에 드론을 띄워 마트 주변을 촬영한다면 장바구니를 든 비슷한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동시에 마트 방향으로 모이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가는 길에 왠지 안면이 있는 어르신을 뵌다.
'또 뵙네요' 눈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어르신도 참 출석률이 좋으셔'
그렇게 모르는 이의 안부와 성실한 성정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에브리바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누리데이다.
일상생활에서 에누리와 할인은
비슷한 용어로 사용되지만
회계에서 둘은 엄연히 다른 의미이다.
'에누리'는
판매된 제품의 품질에 불량이나 하자가 있을 때 해당 금액을 매출에서 차감한다.
'할인'은
판매처가 요구하는 특정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매출액에서 해당금액을 차감한다.
예를 들면,
대금의 조기상환이 이루어질 경우
매출액의 n%를 할인하여 주는 것이다.
(조기상환 : 약속된 날짜보다 먼저 값을 치름)
쉽게 말해
대형 마트 한 편의 유통기한 임박상품코너에서
싸게 파는 물건은 '에누리'를 적용한 것이고,
우리의 눈과 발을 붙잡는 1+1 물건에는 '할인'이 적용된 것이다.
"우리 제품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값을 내렸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에누리는 기업체가 제공하는 제품의 품질과 가격에 대하여 고객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소비자 중심 행위이고,
"이걸 사면 이런 혜택을 줄게요"라는 의미의
할인은 일종의 프로모션(판매전략)으로
기업체 중심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에누리'상품은 애용하지만
'할인'상품에 쉽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위의 말은 그저 내가 알뜰살뜰 살림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한마디면 모두 이해가 되므로 이런 지식이 실제로 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장을 본 뒤 영수증에 적힌 에누리 가격과 단수할인 가격을 보고 괜히 나 혼자 '큭' 한번 웃는 게 전부다.
집에 가면 감자샐러드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만들고 블루베리를 넣은 요구르트와 황금향을 손질해서
아이들 간식과 남편의 아침 도시락을 준비해야겠다.
감자샐러드가 남으면 집에 있는 빵가루를 입혀서 크로켓도 만들어야지.
양배추를 찜기에 찌면 단맛이 더 높아지고 소화도 잘되겠지?
알뜰한 식재료를 이용해
최선의 메뉴로 밥을 짓는 것.
쉬는 날도 없고, 당연함에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모든 주부들의 가치 있는 생산활동이다.
그러니 부디 그대들의 역할을 스스로 평가절하하지 않길 바란다. (나부터...)
동방예의지국의 자랑스러운 인류여!
밥 먹을 때 맛있다고 이야기하자.
고맙다고 이야기하자.
그것이 우리 모두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성경보다도 앞선 진리다.
삼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생각 _10
나의 생산성은 내가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