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겁니다
나는 닭입니다. 하지만 내겐 깃털도, 머리도, 발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 뒤의 흔적만이, 나를 이곳에 놓이게 했을 뿐입니다.
나는 생닭이라고 불립니다. 생을 떠난 내가 생이라는 글자를 달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늘 혼란스러운 것이니까요.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바삐 먹이를 쪼던 순간, 갑작스러운 번쩍임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차가운 비닐 안에서 깨어났습니다. 감각은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 운명마저도요.
이곳으로 오기 전의 기억이 아직 선명합니다. 아늑한 울타리 안, 바람에 흩날리던 풀잎, 내 두 발에 닿던 따스한 흙. 짧지만 안락했던 시기였습니다. 비록 인간의 손에 의해 좁은 닭장에 갇혀 살았지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모이를 쪼아 먹던 그때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알던 닭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매일 새벽, 가장 먼저 우는 친구의 목소리, 모이가 놓이면 서로를 부르던 우리의 울음소리. 그리고 인간의 발소리가 들릴 때 모두가 긴장하던 순간들까지. 모든 것이 지금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어느덧 나는 어떤 남자의 손에 들려 올려졌습니다. "어떻게 손질해 드릴까요?" 누군가 물었고, 남자의 대답은 어수룩했습니다. "아, 백숙할 건데요...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요.", "아, 그러시면 배 가르고 기름 제거해 드릴게요."
이럴 수가, 초짜였습니다. 초짜의 손에 들린 내 운명이, 왠지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이왕 생닭이 된 거, 백종원 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손길로 모든 이의 입맛을 사로잡을 요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생에 더 멋진 생물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고작 백숙을 처음 해본다는 말을 뱉는 애송이였습니다.
물을 끓이기 전, 그가 나의 내장을 씻어내며 말을 덧붙였습니다. "으으, 미안하다."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불안함이 나를 더 애처롭게 만들었습니다.
물이 끓어오르고, 나는 대추와 마늘 사이에서 조용히 익어갔습니다. 고통은 없었으니 다행입니다. 오히려 점차 온도가 올라가는 물속에서, 나는 미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요?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제 대충 된 것 같은데." 남자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내 살점을 찌르고 국물을 떠보며 중간중간 익은 정도와 맛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장모님, 제가 처음 만들어본 백숙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환호를 터뜨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식탁 위의 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살점이 그들의 젓가락에 닿을 때마다,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장모님은 기특하다는 듯 "홍 서방이 웬일이야?"라며 미소를 지었고, 아내는 남편의 서툰 솜씨를 귀엽게 바라봤습니다. 쌍둥이로 보이는 아이들은 국물을 마시며 연신 "맛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역할을 다했다고 느꼈습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내 존재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겁니다.
물이 끓고, 접시에 담기고, 식탁 위에서 해체된 내가 다시금 깨닫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이 이렇게 끝난다 해도, 나를 통해 다른 생명과 그들이 누리는 기쁨은 계속될 테니까요.
그날 밤, 그 가족은 나를 먹으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조용히 사라져 갔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공작새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의 인지가 스르르 멈췄습니다.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