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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밤

그곳은 우리 가족이 우뚝 세운, 거룩한 기념비였다

by 이열 Jan 24. 2025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집을 마련했다. 그곳은 우리 가족이 합심해 우뚝 세운, 거룩한 기념비였다. 지하철역과 공원이 가까운 신축 아파트, 단지 내 아늑한 분위기와 다양한 편의 시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 비춰오는 풍성한 햇살, 모든 것이 밑 빠진 독 같은 통장을 열심히 메꾸며 꿈꾸던 이상향과 일치했다. 무려 10년 동안, 남들 놀 때도 열심히 일하고 투자 공부하며 모은 돈으로 마련한 우리 집.


준수는 늘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지혜야, 우리 꽤 괜찮게 살고 있지 않아?” 준수는 내 집 마련 후 이따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곤 했다. 허당 끼 넘치는 남편이지만, 우리 가족을 부드럽게 리드하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믿음직한 아빠였다.


민우는 우리의 결혼 1주년에 찾아온 보석 같은 아이다. 아직 엄마 아빠 품에만 머물고 싶은 8살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방이 생긴 걸 누구보다 기뻐했다. “엄마, 내 방에선 내가 왕이다!”


민우는 또래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했고 손재주가 좋았다. 그래서 미술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미술 선생님이 민우를 칭찬할 때마다, 나는 민우가 기특했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음에 감사했다. 민우의 영특함은 곧 우리의 자랑이었다.


이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이 떠오른다. 침대 위에서 셋이 엉켜 뒹굴고 있는데 민우가 재잘댔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그림 그리기 했는데, 내가 제일 잘 그렸어!" 민우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랬어? 우리 민우 최고다!" 나는 박수를 치며 맞장구쳤다.

준수는 민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짜식, 아빠 닮아서 미적 감각이 훌륭하구나. 엄마는 그림 진짜 못 그리는데, 캬캬.”

"뭐? 나도 어렸을 땐 잘 그렸거든!" 나는 웃으며 베개를 던졌고, 민우는 깔깔대며 우리를 중재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소소한 대화와 스킨십을 자주 나누며 더 단단해져 갔다.




민우가 미술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아빠, 놀이공원 가는 거 맞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들뜬 목소리로 준수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번 주말에 가자고!"

놀이공원에서의 하루는 민우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깔깔대던 아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돌아오는 길, 민우는 피곤했는지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출근길마다 차로 지나다니던, 행인들의 무단횡단이 잦은 길목에 가까워졌다. 준수가 느긋하게 말했다. "여기선 조심하세요, 송 여사님" 나는 "알아, 알아." 하고 대꾸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50m쯤 앞에서 신호가 막 바뀌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눈앞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아이였다. 순간, 시간은 느려지고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내 손은 얼어붙었고, 머릿속에는 알람처럼 울리는 한 가지 생각이 반복되었다. '멈춰야 해. 지금 멈춰야 해.'

준수의 놀란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여보!"

너무 놀란 나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힘껏 밟았다. 차가 앞으로 쏜살 같이 튀어나갔고, 동시에 한 남자가 나타나 횡단보도로 나온 아이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는 내 차에 정면으로 부딪혀 튕겨 올랐다.


차를 가까스로 멈췄다. 준수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그 순간 세상은 멈춘 듯했다. 나는 얼어붙은 채 운전대를 쥔 손을 떼지 못했다. 민우가 뒷자리에서 나를 향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나는 민우를 돌아보았다. 어린 눈망울 속에 내가 감당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뒷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준수가 황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쓰러진 남자를 살펴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침대에 셋이 함께 누워 뒹굴던 순간만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민우의 웃음, 준수의 장난,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였지만,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일상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다. 나는 유리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 산산이 흩어진 나머지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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