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무언가를 확실히 알아차렸다
일요일 저녁, 홍길동 씨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깅에 나섰다. 주위 모든 사물이 따스하게 그를 굽어보았다. 그의 마음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오늘 몸이 참 가볍구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그의 옆에서, 공 하나가 굴러갔다. 뒤이어 아이가 공을 쫓아 차도로 뛰어들었다. 순간,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날려 아이를 잡아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달려오던 차는 멈추지 못했다. 홍길동 씨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모든 소리가 멀어지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빙그르르.
공중에서 돌고 있는 짧은 순간, 그의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오늘은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가벼운 날이로구나.’ 그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삶의 불운이,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렸다. 아내와 두 딸, 모두 함께 웃으며 밥을 먹던 순간들, 딸들과 나눴던 장난스러운 대화들. "여보, 얘들아..." 그의 마지막 속삭임이 밤공기 속에 흩어졌다.
이른 새벽 홍길동 씨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발밑이 미끄러워 금세 넘어질 듯 위태로웠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결국 발을 헛디뎠고, 꽈당 넘어진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에이씨, 하루 시작부터 기분 잡쳤네.” 그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무언가를 확실히 알아차렸다. 오늘 자신에게 수많은 불운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으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했다.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핸들을 쾅하고 내리쳤다. “아, 짜증 나게 정말.” 바삐 앱으로 택시를 불렀지만, 잡히는 차량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러 나섰다.
지하철 계단을 급히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디뎌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에 찰과상이 생겼고,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주위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끔거리는 게 더 치욕스러웠다. “미쳤군, 미친 하루야.”
투덜대며 개찰구로 가는 도중, 앞에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자기 쪽으로 놓치며 휘청거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홍길동 씨는 마지못해 짐을 들어 올려 할머니에게 건넸다. “자요.”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이상했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어디선가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 이후 하루가 평온했다.
홍길동 씨는 회사에서 여느 때처럼 부하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바보 같은 후배들 때문에 업무가 쌓였다며 짜증을 내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앉았다. ‘아, 저것들 언제 정신 차리나.’
아침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아, 오늘 또 왜 이래.” 세상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끝 모를 비관적인 느낌이 홍길동 씨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차는 고장 난 채였고, 택시는 또다시 잡히지 않았다. 지하철역 계단을 조심히 내려가던 중, 한 청년이 뒤에서 갑자기 뛰어내려오며 그의 어깨를 밀쳤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진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야!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기던 그를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멈춰 세웠다.
“아저씨,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친구랑 보기로 했는데,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어요.”
평소 같았으면 확 쏘아보며 “부모님께나 부탁하라"라며 냉정히 돌아섰겠지만, 잠시 멈칫한 그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얼른 써. 짧게 해.”
소녀가 환히 웃으며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불현듯 그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오전 내내 홍길동 씨의 시간은 평화로웠다. 상념에 잠긴 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점심시간 후 그는 팀원이 정리한 자료를 상무에게 보고했다가 된통 박살이 났다. 집무실을 나온 홍길동 씨는 벌게진 얼굴로 팀원들을 소집했다. “야이씨, 다들 회의실로 모여!”
침대에서 나올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절망감에 빠진 홍길동 씨는 웅크린 상태로 자신의 상태를 고민하다가 불쑥 황당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선행이 불운을 막는다?’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횡단보도 앞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줌마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쌩하니 지나갔겠지만, 어색하게 종이를 받아 들었다. 계단에서 넘어진다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지하철에서 짐을 든 노인을 보고 말없이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했다. 회사에서 보고를 잘못했는데도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실수를 한 부하 직원에게 처음으로 “괜찮아. 다음엔 조심하면 돼.”라고 말했다.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탈한 하루에 기분이 좋았다. 그만 퇴근하려 책상에서 일어나니 부하직원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팀장님, 오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별로.” 무뚝뚝하게 답하고서 뒤돌아서며 웃음 지은 홍길동 씨. ‘정말 효과가 있나 봐?’
생각에 잠긴 홍길동 씨가 집 앞 건널목을 건너는데, 기다리고 있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울컥 분노가 치민 그가 운전석을 쏘아보며 한바탕 욕을 하고 범퍼를 걷어찼다. 차 주인이 쌍욕을 하며 내렸다. 둘은 멱살잡이를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 to be continued -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