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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사랑

소녀는 소년과 함께라면 어떤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 같았다

by 이열 Jan 11. 2025

소녀는 항상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았다. 햇살이 책장 위로 부드럽게 나부끼는 그곳은 소녀가 유일하게 안온함을 느끼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날,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처음 보는 소년이 그녀의 일상을 흔들었다. 그는 책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찡긋거리는 짙은 눈썹과 하얗고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벼운 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스쳤다.


소녀는 무심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소년이 다가왔다. “그 책, 재미있어?” 당황한 소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 책 읽어봤는데, 그냥 그랬어.” 대화는 짧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게 되었다.


며칠 후, 소녀는 소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슬며시 살펴봤다. 《사피엔스》라는 제목이었다. “그거… 재밌어?” 소년이 돌아왔을 때, 소녀가 물었다. “응, 인간 사회가 허구를 통해 발전했다는 해석이 재미있더라고. 난, 역사를 좋아해. 역사를 보면 인간을 알고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신이 난 듯 빠르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은 누구야?” 소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간디. 폭력이 아니라 신념으로 세상을 바꿨으니까.” 그날 이후, 소녀는 세계사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소녀는 우산 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를 적셨다. 그때,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졌다. “혼자 이렇게 걷고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소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우산을 조금 더 기울이며 웃었다. 둘은 좁은 우산 아래서 천천히 걸었다. 빗소리가 귓가에 리듬을 만들고, 거리의 불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흔들렸다. 소녀는 그저 조용히 걸었다. 그에게서 비누 향이 났다.


그날 이후, 둘은 도서관 밖에서도 보는 사이가 되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난 언젠가 사람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알려주는 사람 말이야. 너는 어때?” 소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네가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가?” 소녀는 소년과 함께라면 어떤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 같았다.




소년은 밝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소년은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소녀와의 만남을 미뤘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허전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누구와 함께 있을까?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는 소년이 자신에게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음 날, 그녀는 무작정 소년이 말했던 카페로 갔다. 그는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황급히 몸을 숨겼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녀는 그가 보였던 웃음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보여준 미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걸까?


그날 밤, 그녀는 결심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소녀에겐 소년밖에 없었다. 소년도 그래야 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건우야, 잠깐 나 좀 봐줘.”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친구들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기억이 바뀌었다. 그리고 또 지워졌다. 소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의 기억은 변형되거나 사라졌다.


건우의 표정이 점점 멍해졌다. 그는 그녀와 대화 중 종종 멈칫하며 말했다. “우리 전에 이런 얘기 한 적 있지 않아?”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네 착각일 거야.”




건우는 자신이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강하게 느꼈다.


책상 위에 턱을 괴고 고민하던 그의 시선 한 편에 책꽂이에서 튀어나온 노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노트를 열어 보니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억이 반복적으로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잃어간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비슷한 문장들이 날짜를 달리하며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는 의심을 거뒀다. 확신이 들었다.


건우가 소녀를 마주하며 말했다. “재이야... 사실대로 이야기해 줘.” “건우야, 뭘?” “이제 그만해. 내가 누구인지 잊어가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모를 거야. 도대체 어떻게… 아니, 이유가 뭐야?” 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건우야, 우리 행복하잖아. 난 너 하나로 완성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항상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고.” 건우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 “그게 네가 원하는 사랑이야? 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제발 내 기억을 다시 돌려줘. 그리고 날 놓아줘.”


그녀는 울면서도 끝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우린 하나야.” 건우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부러 재이를 피했지만 재이는 그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동행을 요구하는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건우는 작전을 바꿨다. 재이와 다시 만나는 척했다. 다만, 둘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침울한 태도를 유지했다. 재이가 질려서 자신을 내치길 바랐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왜 계속 그를 붙들고 있는지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상심한 그녀가 무심코 그에게 말했다. “건우야, 왜 그래. 웃어 봐 좀.”

누군가 갑자기 볼을 잡아당긴 듯 그의 입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솟았다.

건우는 환멸을 느꼈다. 다시 강경하게 이별을 요구했지만 재이는 여전히 단호했다. 결연한 그녀의 눈을 보며, 건우는 지금 자신의 기억마저 지워질까 봐 두려웠다. 그는 비통함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떠올렸다.




아침 등교 시간, 건우네 집 앞에서 재이가 그를 기다렸다. 집 밖으로 나온 건우를 보고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양쪽 귀를 붕대로 감싼 건우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 네 목소리 들을 수 없어. 이제 나는 내가 될 수 있어.”


건우가 그녀를 남겨둔 채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재이는 오열하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더 이상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이는 홀로 공원에 앉아 흐느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널 지키려 했던 내가 결국 널 망가뜨렸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느껴 보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짓눌려 자기 안으로 서서히 침잠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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