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몇 페이지를 읽고 불을 껐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회사 건물 로비에서 퇴직한 선배를 기다렸다. 유리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표정이 밝았다. 풍기는 분위기에서 색채가 짙어졌다.
"오래 기다렸어?"
선배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차분하고 낮은. 그러나 알고 있는 톤보다 높아졌다. 압박감이 사라진 걸까. 우리는 회사 건물 옆 오래된 일식집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한창이라 가게는 북적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몇 번 와본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창 너머 풍경이 어색했다. 햇빛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뻔한 질문이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선배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매일 밤 악몽을 꿨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메뉴판을 덮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30년이면 긴 시간이지. 처음 입사했을 때는 결혼도 안 했고, 머리카락도 까맣고 풍성했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다고 하니까..."
주문을 위해 종업원이 다가왔다. 선배는 그가 지나간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평생 습관처럼 해왔던 일이 사라지니까.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화장하고, 차려입고...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진 거야."
선배는 재미있지 않냐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귀 기울여 들었다. 문득 이 대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업무와 성과, 목표와 전략에 관한 이야기만 했을 뿐.
"처음 한 달은 정말 힘들었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그냥 집에만 있었어."
음식이 나왔다. 선배는 젓가락을 들어 천천히 음식을 집었다. 예전 같았으면 회의 준비를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날 끌고 밖으로 나갔어. 그냥 동네 산책하자고. 처음에는 싫었지. 누가 날 알아보고 수군거릴까 봐.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선배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근데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더라고. 편했어.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휴가를 내고 평일 낮에 혼자 영화를 볼 때 느끼는 해방감 같은 것.
"내가 회사에 있을 때는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봤던 거야. 상사의 눈치, 부하 직원들의 눈치, 심지어 경쟁사의 눈치까지. 근데 그게 사라지니까... 내가 보이더라고."
"내가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회사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 항상 다음 분기 목표, 다음 프로젝트, 다음 승진... 그런 생각뿐이었지."
선배는 천천히 밥을 먹으며 계속 말했다.
"지금은 간간이 강연도 하고 있고.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곳도 있어. 이제 속쓰림도 사라졌고."
그녀의 얼굴에 편안함이 묻어났다. 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선배의 젊은 시절 이야기, 입사 초기의 실수담, 그리고 지금의 소소한 일상들.
"요즘 회사는 어때? 여전히 바쁘지?"
"네,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여전하죠, 뭐."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회사에만 모든 걸 걸지 마. 삶은 그것보다 훨씬 넓어."
뻔한 말이지만 가슴을 울렸다.
"선배님, 근데 정말 달라 보여요. 더 젊어 보이세요."
자연스럽게 호칭이 바뀌었다. 더 이상 그녀는 상무님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한 구간을 먼저 걸어간 선배.
"회사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뭐예요?"
선배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가 본 풍경이 회사 풍경뿐이었다는 거야. 아침에 어두울 때 출근해서 밤에 어두울 때 퇴근하니까, 계절이 바뀌는 것도 제대로 못 봤어. 어느 날 문득 깨달았지. 내 인생의 모든 전구가 회사라는 한 공간에만 켜져 있었다는 걸."
회사로 돌아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매일 타는 이 상자가 그날따라 좁게 느껴졌다. 선배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날 저녁, 일찍 퇴근했다.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집안을 정리한 다음 오래전에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꺼냈다. 단 몇 페이지를 읽고 불을 껐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스위치를 내렸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