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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계단을 오르며, 삶의 새 페이지를 열다

산책길에서 계단과 마주하다

by 힐링작가 김영희


하나, 둘, 셋… 나의 발소리가 가을 산책길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어느덧 곱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사르르 흔들리고, 그 사이로 새로 생긴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둘러 가니 도로변에서 공원으로 진입하도록 만들어진 새 길로 이어졌다. 얼마 전 “Willson Creek Trail”이라는 이름표를 단 표지판이 달려 있던 걸 재미있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다. 거기서 공원으로 진입하는 계단을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 계단, 여덟 계단, 일곱 계단, 세 계단으로 나뉘어진 20개의 계단이 완만하게 만들어졌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보았다. 올라 갈 땐 몸을 앞으로 좀 숙여서 앞을 보고 오른다.


맨 위까지 올라가서 뒤돌아보니 멀리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문득 나의 '백세 설계도가 머릿속을 스쳤다. 백세. 숫자만으로도 벅찬 그 시간들을 나는 이 계단 하나하나에 빗대어 세어보고 싶어졌다. 매일 계단을 세며 이곳 계단을 5번씩 오르락 내리락 하여 100개 계단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백 개의 계단을 오르면, 나의 백세 설계도 한 페이지가 완성될 것만 같은 설렘이 가슴에 차올랐다.


까르르 웃던 어린아이의 발걸음은 힘찬 청년기를 지나, 두 아이 손을 잡고 조심스레 디뎠던 중년의 묵직한 계단으로 이어졌다. 숨 가쁘고 때로는 벅찼던 순간들 속에서도, 나는 쉼 없이 다음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팔순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계단에 서 있다. 유년의 나는 계단을 두 칸씩 폴짝거리며 뛰어올랐다.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다시 일어나 뒤돌아보면 수많은 계단들이 겹겹이 쌓여 아름다운 추억의 탑을 이루고 있다. 그 계단마다 땀과 눈물, 기쁨과 깨달음이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인생은 참으로 신비로운 계단 오르기였다.

때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영희야, 한 발 더!"라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다시 힘을 냈다. 삶의 굴곡처럼 찾아오는 계단의 난관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나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곤 한다.


일흔아홉, 여든, 여든 하나… 숨을 고르고 첫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내가 이미 오른 계단들을 돌아보니 매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발자국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에 의미를 부여하며 천천히 숫자를 세어갔다. 내 호흡은 점차 깊어지고, 마음속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흔, 여든 고개를 넘고 있는 지금, 이 계단을 오르는 행위는 단순히 걷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의 다음 장을 향한 나의 굳건한 의지요, 여전히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로 여겨진다.

아흔아홉, 백… 과연 백 번째 계단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아마 지그시 눈을 감고, 내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되새겨 볼 것이다. 백세는 그저 살아있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삶이 선물한 모든 경험과 지혜, 사랑이 응축된 하나의 빛나는 결정체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쩌면 인생의 가장 높은 곳, 더 이상 갈 수 없는 도착점에서, 지혜로운 미소를 띠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눈빛을 건네고, 젊은 영혼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을 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나의 백세 설계도를 그려 나간다. 눈앞의 계단은 멈추지 않는 삶의 상징이며, 내가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희망의 발자취가 된다. 백세라는 숫자가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어진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임을, 이 계단을 오르며 깨닫는다. 나의 걸음은 계속될 것이고, 나의 이야기는 계속 쓰일 것이다. 삶은 멈추지 않는 계단 오르기와 같다. 나는 매 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기꺼이 다음 페이지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다음, 그다음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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