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후손 최해 이야기
다른 글을 쓰려고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그 사이 미리 써놓은 글을 다시 버무려서 올려봅니다. 이 글도 다듬다 보니 몇 시간이 후딱 날아가버렸습니다만...
최해(崔瀣, 1287~1340)는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관료입니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14세기 전반으로, 이 시기는 원나라에 의해 고려의 자주권이 크게 침해를 받았던, 이른바 '원간섭기'에 해당합니다. 이 무렵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이 도입되었는데, 성리학을 수용한 개혁적인 지식인층을 일컬어 '신진사대부'라고 하지요. 최해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최해는 '신진사대부'라는 아이덴티티도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최치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최치원(崔致遠, 857~?)은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이 들어서려는 시기에 활동한 유학자입니다. 그는 골품제에 따르면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6두품은 재주가 있어도 고위관료로 승진할 수 없었고, 당시 6두품 중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를 쳐서 출세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었던 그 역시 12세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세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을 합니다. 하지만 장원급제를 하더라도 이방인의 몸으로는 하급관료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하러 출병한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막료가 되었을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작성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종군 생활에 질린 최치원은 884년 고국으로 돌아왔고, 신라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는 여전했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지방관(그것도 신분으로 인해 구청장/군수 급에 머무르는 수준)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는 개혁안인 '시무 10여 조'를 제출해 보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실망하여 관직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학문과 문학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행적은 확실한 것이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통해 908년까지는 생존했던 것은 확인됩니다. 세간에서는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전국 곳곳에 그가 유랑하며 방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해운대도 그중 하나입니다.
최치원은 불우하고 고단한 일생을 살았지만, 사후에는 한국 유학의 시조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사후 100년 정도가 지난 1020년(고려 현종 11), 국학인 국자감(國子監, 훗날의 성균관)의 문묘(文廟: 유교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에 그의 위패가 모셔집니다. 그 이전까지 고려 문묘에는 중국의 유학자들만이 모셔졌으며, 최치원은 우리나라 유학자로서는 최초였습니다. 3년 후인 1023년에는 '문창후(文昌侯)'로 추봉 되었습니다.
최해가 활동하던 시점에서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유학자는 설총(薛聰)과 안유(安裕, 곧 안향安珦)까지 셋 뿐이었습니다. 최해는 자기 조상이 성현으로 꼽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최치원의 삶을 본받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는 고려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원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최치원처럼 중국 과거 급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34살이던 1320년에 원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였으나, 지방관 생활을 하다가 5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마저도 최치원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그에게 최치원은 '조상이자 우상'이었던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치원은 귀국 후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지만 최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귀국 후에 관직에 복귀하여 성균관 대사성(대략 지금의 서울대학교 총장에 해당)까지 승진하였습니다.
최해는 학문은 뛰어났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괴팍하며 거리낌 없는 성품으로, 스스로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최해가 쓴 자전적인 글입니다.
차츰 장성하게 되자 비장한 각오로 출세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그(최해)의 성격이 윗사람을 찾아가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며, 또 술을 즐겨 두어 잔만 마시면 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도무지 귀로 들은 것이면 입이 그것을 간직할 줄을 몰랐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남의 아낌과 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벼슬을 했을 때마다 곧 배척당하여 쫓겨나곤 하였다.
- 최해, 『졸고천백』 「예산은자전」 중에서
그의 성격은 젊은 시절에도 만만찮았는데,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인물 조에 그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 일화에 제 설명을 덧붙인 겁니다.
최해는 젊은 시절 동래현을 지나다가 존경하는 조상 최치원의 사적지인 해운대를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해운대'는 최치원의 자(字) '해운(海雲)'을 따서 붙인 지명입니다.
오늘날 해운대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해운대구'라는 인구 37만이 넘는 거대한 행정구역의 명칭입니다. 하지만 원래 '해운대'라고 하는 장소는 해운대 해수욕장 옆 동백섬에 있는 바위 해안의 이름이었습니다.
조선 영조 때의 통신사 조엄(趙曮)이 해운대를 방문해서 남긴 묘사를 보면, '해운대 석각'이라고 하여 동백섬에 남동쪽 끝 바위에 한자로 '海雲臺'라고 새겨진 곳이 바로 그곳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동백섬 정상에 최치원 선생 동상이 세워져 있지요.
해운대 앞에 바위가 3면을 둘러싸서 층층을 이루고, 넓적하여 1,000명도 앉을 만하며, 앞이 트여 대마도(對馬島)와 마주하니 중간에 가리는 것이 하나 없다.
- 조엄, 『해사일기』 1763년 9월 3일
그러니 최해가 해운대를 방문했다는 것도 모래사장이 아니라 동백섬을 방문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최해나 조엄뿐만이 아니라 최치원을 존경한 수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들러 그 소감을 시로 써서 남기곤 했습니다.
해운대를 방문한 최해는 누군가가 나무 둥치 한 면을 깎아 거기에 글씨를 써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동백섬에 가보면 해송이 빽빽하게 자라 있는데, 그중 하나였을까요?) 이것은 합포(合浦, 창원시 마산 지역에 있던 수군 기지) 만호(萬戶)인 장선(張瑄)이 해운대에 와서 자기 감상을 시로 써놓은 것이었습니다.
최해가 그 시를 찬찬이 읽어보니 너무나 졸렬했습니다. '해운대'의 이름을 남긴 조상 최치원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까지 드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 이 나무는 무슨 액운이 있어 이런 나쁜 시를 만났는가!"
최해는 이렇게 한탄하고는 칼로 그 시를 파내고 흙을 발라 버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선은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거느리는 맹장 서넛을 보내 최해를 추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안동에서 하인 한 명만 붙잡히고, 최해는 몰래 죽령을 넘어 개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보통 동래에서 개경으로 달아난다면 상주를 지나 조령을 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최해는 누군가 쫓아올 것을 예상하여 안동을 지나 죽령으로 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아마 본인은 말을 타고 도망치고, 하인은 걸어서 따라가다 안동쯤에서 추격대에게 붙들렸을 겁니다. 그 애꿎은 하인은 합포영으로 끌려가 영문(營門) 앞에서 칼이 씌워진 채 조리돌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실이 동료 유학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최해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최해는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게 되는데, 아마 이런 외골수인 성격으로는 원간섭기의 혼탁한 정치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자갑사(師子岬寺)에 의탁하여 농사를 짓고 저술활동에 매진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