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울증을 앓은 지 구 년이 되었다. 많은 정신의학과를 거쳐갔고, 매일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으며, 잠들면 한 시간마다 깬다. 소설은 늘 어렵고, 꾸준히 읽고 쓰자고 다짐하지만 하루에 한 자도 읽고 쓰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들이 조각나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하나로 이어진 하루와 일상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처럼 나를 조각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파편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정신의학과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안정을 느낄 수 없다는 자괴감, 이대로 소설을 쓰다가는 작가는커녕 취직조차 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 우울증과 더불어 나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 끝에서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것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뜨개질이 있기 때문이다.
뜨개질을 시작한 지 이 년이 되었다. 그간 많은 편물을 만들었고, 여러 호수의 코바늘을 잡아 보았으며, 다양한 촉감의 털실을 꿰었다. 지금은 비니를 뜨고 있다. 작년 겨울에 떠서 잘 쓰고 다니던 비니가 수명을 다했는지 마감한 부분의 털실이 서서히 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비니였는데 더 이상 못 쓰게 된다니 속상했지만 다시 뜨면 된다. 뜨개질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뜨다가 실패하거나 편물이 망가져도 다시 뜨면 된다는 것이다. 코바늘과 털실, 손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뜰 수 있다. 책장에서 작년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이어리 한 편에 그려진 내 머리 사이즈에 딱 맞는 도안을 찾아냈다. 비니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면 해서 사 밀리미터 정도 두께의 두꺼운 푼토 실을 사용했다.
연회색 컬러의 푼토 실을 이용해서 긴뜨기로 전체 면을 뜨고 짧은뜨기로 세로 면을 이어준다. 가로 면에 돗바늘로 듬성듬성 실을 꿴 다음 있는 힘껏 잡아 당겨주면 편물이 오므려지면서 비니의 윗부분이 만들어진다. 라이트데님 컬러의 푼토 실을 이용해서 사슬뜨기로 뜬 리본을 만든 후 돗바늘로 비니에 달아주면 리본 비니가 완성된다. 푼토 실이 두껍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잘 갈라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전체 면을 뜰 때 조금 애를 먹는다. 그래서 아직 전체 면을 뜨고 있지만 비니는 이삼 일이면 완성할 수 있는 편물이라 금방 완성할 듯싶다.
실 갈라지듯 삶이 갈라졌을 때가 있었다. 나는 학업 스트레스와 가족 불화로 인해 중학생 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가 대학생 때였다. 우울증은 사람을 무(無)로 만든다. 존재를 지운다. 학교와 직장 생활,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전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중 가장 말끔히 지워버리는 건 ‘일상’이다. 침대에 누워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울었다. 밥을 챙겨 먹지 못하고 제대로 씻지 못했다. 집안일을 하지 못해 싱크대에 설거짓거리가 쌓이고, 바닥에는 먼지와 머리카락이 쌓였다.
당연히 소설도 쓸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써도 한 자도 쓰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 얼굴이 퉁퉁 붓고 코가 빨개진 내가 있었다. 그마저도 흐릿해져 갔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로서의 존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와중에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존재가 흐릿해져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우울증으로 인해 힘이 없고 모든 행동이 느릿해진 나로서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나를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존재가 사라진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무(無)인 내가 유(有)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고등학교 시절 큰이모가 줬던 금색 코바늘이 떠올랐다. 뜨개질 고단수인 큰이모가 뜨개질하는 것을 보고 괜히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남는 코바늘 하나를 달라고 해서 가지게 된 것었다. 뜨개질을 딱히 하지 않아도 부적처럼 들고 다녔던 것인데, 이 년 전 혼자 살게 되면서 자취방에까지 들고 왔었다.
사라졌다면 다시 만들면 된다. 내겐 무언가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작고 하찮을지라도 내 손에서 태어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온 집 안을 뒤졌다. 꺼낸 물건은 다시 정리하지 못할 게 분명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금색 코바늘과 뚜렷한 나의 존재가 중요했다. 평소 잘 열지 않는 서랍까지 헤집어놓은 끝에 서랍 한구석에서 코바늘을 찾아냈다. 다이소에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검은색 털실을 사 와서 번뜩 떠오른 듯, 동시에 무언가 내던진 후처럼 뜨개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뜬 것이 비니였다. 치수를 재지 않고 무작정 유튜브 영상을 보며 뜬 터라 내 머리보다 한참 작은 비니가 만들어졌다. 써보니 골무를 쓴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그걸 보고 웃었다. 얼마 만에 웃는지 광대가 저렸다.
이것이 내가 뜨개질을 계속하는 이유이다. 뜨개질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무언가를 남긴다. 어설프고 엉성한 편물이 완성되어도 미소가 지어진다. 복슬거리며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었으니까. 내 안에 무언가가 남았으니까. 다시금 손에 무언가를 쥘 수 있다.
이 글을 쓴 후 계속해서 비니를 뜰 생각이다. 갈라짐을 겪었음에도 굵은 털실을 살 것이고, 한 코도 못 뜬 날이 있겠지만 다음 날에는 한 코를 뜰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손에 알약만을 쥐지 않고 손가락에 핏금만을 두르지 않기 때문에. 코바늘을 쥐고 털실을 두를 수 있기 때문에. 사라졌다면 다시 만들 것이고, 지워졌다면 다시 쓸 것이다. 앞으로의 글은 이러한 나의 복슬한 한 줄, 한 줄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