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던 어느 가을날. 버스는 육중한 몸체를 흔들며 비포장 산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한 발짝 나아갈 때면 어김없이 크게 비틀거리며 엉덩이로 한 움큼씩 시커먼 연기를 토해냈다.
이등병은 어쩌다 얼떨결에 군악병이 되었다.
논두렁 음악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깜깜이가 겁도 없이 군악병 차출에 손을 번쩍 들어버린 이유는, 단지 '때깔이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똥폼 한번 잡으려 무모하게 덤볐던 이등병의 후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럼 파트의 심벌즈 담당이었다.
드럼 파트는 두들긴다 하는 악기는 모두 포함된다. 큰북, 작은북, 심벌즈는 물론이고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악보는 타악기에 비한다면 쉽고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서 반푼수 짓이나마 해 본 사람의 입장이지, 드럼 연주라곤 후배들 연습실에서 눈동냥으로 몇 차례 지켜본 게 다인 날초보에게는 어렵기가 러시아어 배우는 것과 진배없었다.
음악을 전공하다 차출된 고참들의 눈으로 본다면, 이거 패 죽일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눈만 뜨면 이등병의 머리통은 '드럼 마치'로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대,소북만으로 연주를 하는, 드럼 파트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인 곡이다. 숙련된 드러머의 타격은 스냅 한방 한방이 타이슨의 핵펀치 마냥 육중하고 날카롭다. 타점은 정수리였지만, 통점의 진원지는 항문에서 시작되어 온 사지 구석구석까지 고통을 몰고 다녔다. 되돌이표가 있는 무한 반복의 행진곡, 그 드럼마치가 이등병의 머리 가죽통 위에서 연주된다. 그렇게나 난타를 하고서도 분이 삭지 않으면, 주먹만 한 바순 피스를 가져와서는 누더기가 된 대갈통에 최후의 일격을 안긴다. 어디가 아픈지를 모른다. 분명히 머리통에 맞은 거 같은데, 손, 발가락까지 저리고 아프다. 특정부위가 있어야 감싸 쥐던 비비기라도 할 텐데, 모세혈관 전체가 통증으로 마비된 듯한 우릿한 고통이 지속된다.
타악기 파트라고 해서 시창, 청음을 비롯한 화성학 교육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이 음악인 삶을 살았던, 어쩌면 음악 하나만 잘하며 살았던 고참들 틈바구니에서의 이등병의 존재는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한 마리 좀비나 다름없었다. 인간적 모멸감이야 진즉에 면역이 생겨 견딜만했지만, 구타와 기합의 아픔은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조금도 무뎌지지가 않았다.
산중 막사에 서식하는 삼선 아디다스 모기의 침은 천막도 꿰뚫어버릴 정도로 위력적이다. 소위, 빵빠레라고 일컫는 팬티 차림의 모기회식은 정말이지 견디기가 쉽지 않은 고문이었다.
당시 군대는 피 끓는 청춘들을 끌고 가서 두 가지는 확실하게 가르쳤다. 남의 집 귀한 자식 괴롭히는 것과, 국가가 아닌 정권 권력자에게 빌붙어 먹는 것이 충성이라고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남자라면 꼭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호도했는지 모른다. 정권의 개로 길들이기에는 군대만 한 곳이 없으니...
달리는 트럭에 발을 집어넣을까, 무거운 거 들다 그대로 손을 짓이겨버릴까...하루에도 골백번 결심을 하고 달래기를 되풀이했다. 스물 꽃다운 시절의 청년은 이렇게 하루하루 시들어 갔다. 영혼은 메말라가고 뽀송 거리던 잎새에서는 날 선 가시들이, 아름답게 터트릴 날을 기다리던 봉오리에서는 꽃잎이 아닌 독이 스멀거리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용문산 굽이돌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기적소리.
초병의 깊은 밤, 우수수 쏟아져내리는 별빛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만큼 마음도 슬프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다 큰 놈이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멈추지 않고 두 뺨으로 타고 내리는 눈물, 눈물.
아름답다는 게 슬픔이 될 수 있는 밤.
스물도, '아이'인것을.....
한참이나 뒤뚱거리며 버스는 가을의 가운데를 지난다. 따땃한 햇살과 흔들림이 연신 졸음을 강요한다. 잠시간의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귀대 후에 닥칠 군악대 특유의 무자비한 폭력의 빌미를 만들어 준다.
서슬 퍼른 고참들의 날 선 시선이 뒤통수에 꽂힌다.
용문산 허리 돌아 광활한 종합 포격 훈련장에는 억새가 만개를 하였다. 가을바람이 이끄는 데로 몸을 뒤척이는 억새군락은 매번 색깔을 달리하며 장관을 이루었다. 바람과 한 몸으로 동화된 억새가 만들어내는 오묘한 은빛이 비단결처럼 출렁이며 환상을 그려냈다.
숨통을 조이는 극도의 긴장감과 가을 햇살에 일렁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억새.
말이 안 되는 상황이 같은 공간 안에 뒤섞여있었다.
처음으로 이등병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보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