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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하

나는 새를 키운다.


새를 키운 지 어언 10년 넘은 것 같다. 대학생 때 아빠가 새를 키우고 싶어 했고, 어느 날 하얗고 뽀얗게 생긴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새를 한 쌍 데리고 왔다.


새의 종은 문조, 흰색이어서 백문조라고 불리는 처음 보는 새였다. 앵무새처럼 대중화된 새가 아니어서 처음에는 낯설기도 했고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싫어 다시 팔라며 싫어했지만 어느새 내 삶에는 그 하얀 물체가 내 맘에 들어와 버렸다.


그 하얀 한 쌍의 자그마한 새들은 어느새 우리 가족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한 쌍의 백문조가 알을 낳았다.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새로운 백문조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 작은 존재가 내 손에 올라와서 짹짹되며 이유식을 먹으면서 기기 시작하고, 날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어린 새가 어른 새가 되었을 때 분양을 보냈고, 다시 다른 해에 알을 낳으면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작은 새를 키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평소와 같이 어린 새들에게 이유식을 주려고 했는데 두 마리 새 다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병원에서는 두 마리 다 다리가 휘거나 부러져 스스로 걸을 수도, 날 수도 없을 것이라며 포기하라고 했다.


우리 가족의 쓸데없는 고집이라면 모두 오기가 강하다는 걸까. 특히 아빠는 포기하라는 의사 선생님 말에 오기라도 생긴 듯이 그 두 어린 새들에게 희망이와 반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곤 아침마다 기도를 하며 아기들을 지켜주었다.


그래서인지 희망이는 스스로 걷지도 못하고 스스로 날지도 못하지만 무려 7살까지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다 이유 모를 이유로 집에서 편안하게 무지개별로 떠났다. 그리고 반달이는 희망이 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살 수 있었지만, 반달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간 길에 길고양이가 반달이를 물어갔다. 온 수풀을 뒤져 다행히 살아있는 반달이를 찾았지만, 고양이에게 물린 상처를 통해 패혈증이 와서 안타깝게 8살 만에 무지개별로 떠나버렸다.


그리곤 엄마는 어언 10년 동안 함께 살던 새들이 없어진 허한 마음에 다른 문조를 입양하기로 하였고 지금 우리 집엔 밤토리라는 검정 문조인 흑문조, 밤송이라는 갈색 문조인 갈문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집에는 새가 함께 살고 있다.


새와 함께 살면서 나는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제일 아끼던 희망이와 반달이가 아플 때는 내가 대신 아프고 싶었고, 아이들이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는 죽을 만큼 힘들었고, 그 반대로 내 손에서 가만히 앉아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볼 때는 아이들의 맘은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나에게 왠지 모를 위로가 되었으며, 내가 죽도록 힘들 날에는 새를 손에 얹고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새기면 진짜 그럴 거야라고 답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손보다 작은 새에게 그렇게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고 새 삶을 얻을 용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왜 하필 그 반려동물이 흔한 강아지, 고양이가 아닌 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나의 선택보단 아빠의 선택으로 새라는 존재를 내 마음에 들이게 되었지만 나는 강아지와 고양이보다 새라는 존재가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흔히 새라는 존재는 세상을 훨훨 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장 속에 갇혀버린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양면성을 모두 다 가진 존재라니, 근데 이런 존재가 또 있다.


바로 사람 마음이다. 사람 마음도 새의 묘사처럼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선과 악처럼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다. 특히 나는 밝음과 우울의 두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 양면성을 모두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새를 더 좋아했나 보다.


흔히들 책을 새로 낼 때 이 책을 누구에게 바칩니다.라고 쓰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내 삶의 위로가 되어준 희망이와 반달이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희망이
반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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