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병원에서 적응은 수월했다. 같은 병실에 계신 분들 모두 친절했고 무엇보다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전처럼 닦달하지도 낱말카드를 들이밀지도 않았다. 쉴 땐 쉴 수 있도록 했고 괜한 농담을 많이 했다. 엄마가 밝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이런저런 말들도 많아졌고 의외로 엄살도 심해져서 피를 뽑고 난 뒤 팔이 아프다고 징징대거나 재활이 조금만 힘들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어디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는데 우리 엄마가 이렇게 귀여웠던가 싶었다.
새로운 병원에서 적응이 채 다 되기도 전에 난 이제 회사에 복귀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같은 병실에 가끔 오시는 간병인분을 추천받아 그분께 엄마를 맡기기로 했다. 간병인은 구했지만 엄마에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 난관이 남아있었다. 아니 이해가 아니라 기억에 남도록 해야 하는 게 남은 것이다. 단기 기억은 거의 휘발이라 방금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기에 여러 번 반복해서 알려줘야 했었다.
"엄마 나 이제 회사 가야 해. 주말에 올 거야. 간병인이랑 이제 지내야 해"
"언제 가는데?"
"다음 주에 가"
대화 끝엔 여지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엄마였다. 7살짜리 아이가 우는 것처럼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엉엉 울곤 했다.
엄마는 먼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기에 손을 꼼지락 거린다던지 다리를 움직이는 게 신호였다. 그럴 때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물어봐야 했다. 그렇게 재활 시간 중간중간 엄마를 잘 케어해 줄지 밥 먹는 게 오래 걸리는데 옆에서 잘 챙겨줄지, 물도 먹여줘야 하는데 다 해줄지 걱정만 한가득이었다.
알고 있다. 나 없어도 엄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고 큰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걸.. 내가 했던 것만큼은 바라지 않고 내려놔야 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기억력이나 인지가 정상이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에게 연락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기억력도 인지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스스로 휴대폰을 사용할 줄 몰랐기에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이 언제나 걱정스러운 게 현실이었다.
엄마에게 이제 간병인과 지내야 한다고 일주일 가량을 설명을 해줬던 것 같다.
"나 어디 간다고?"
"일하러"
지속적으로 말을 해준 게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간병인과 교대한 후 치료사 선생님들이 딸은 어디 갔냐고 묻기만 해도 내내 울기만 했다고 한다. 일주일 넘게 그랬었다고 나중에 치료사 선생님들께 들었다.
일주일 정도 엄마에게 나는 이제 집으로 간다고 설명을 하고 새로운 간병인과 인사를 나누게 하고 주의사항을 종이에 적어 전달해 줬다. 유의할 점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 달 만에 내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때는 엄마가 살던 집에서 지냈고, 내가 살던 집으로는 간병 시작 한 이후 한 번도 올 수가 없었다. 캐리어에 짐을 풀고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 청소를 하니 하루가 다 가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정적인 집안을 둘러봤다. 얼마 만에 여유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병원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엄마의 기저귀를 갈고 섬망으로 깬 엄마를 달래고 했던 모든 모습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따금씩 들리는 창 밖의 차 지나가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현재도 역시 비현실적으로 느꼈졌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며 좋겠다고 생각하고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와 8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15년 넘게 같이 살았던 것 같다. 내가 20대 초반에 연고지 없는 이 동네에 이사를 왔고 집을 구해서 나온 게 30대 후반이었다.
엄마는 결혼 전까지 독립은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염두는 없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사사건건 엄마와 부딪혔고, 사실 뭐 때문에 그렇게 싸웠는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엄마도 지쳤던 것 같다.
거실이랄 것도 없이 작은 부엌하나에 안방과 작은방, 그리고 베란다.
그 좁은 집에서 엄마도 지쳐갔던 것이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쳐갔고 나는 엄마의 고단함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와 너무 싸우기도 했고 남자친구와 결혼도 생각 중이었는데 그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집을 구하겠다 말한 뒤 내심 반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엄마도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 반기내는 내색이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전세를 알아봤는데 어쩌다 보니 집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방 세 개짜리 작은 빌라였다. 내 이름으로 갖게 된 첫 집이었다.
엄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구하게 됐다. 계약일 전에 엄마와 같이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아빠와 통화(이혼 하긴 했지만 자식들 관련된 일로 통화는 가끔 하는 사이였다)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부모도 못해본 매매 계약서를 쟤가 해본다. 일평생을 당신이나 나나 한 번도 못해본 건데"
계약일에도 엄마와 같이 갔다. 계약일에 부동산에서 간단하게 자금 출처를 물었다. 부모에게 받은 돈일 경우 세금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엄마는 신났던 건지 화가 났던 건지 목소리가 격양돼서
"얘 부모한테 한 푼도 안 받았어요. 혼자 다 번 돈이에요."
라며 내가 답변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갔다.
엄마도 집에 한이 많았구나. 그래... 그랬겠지.. 월세가 밀려 밖에 서있는 집주인 눈치가 보여 아들 생일에 케이크 사러 가지도 못하던 그런 서러움의 세월에서 한이 맺혔겠지
내가 이사한 그 이후 언젠가 퇴근 후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지금 생각해 보면 너 집 샀다고 엔간히 자랑을 하고 다녔어. 아파트 청약이라도 된 줄 알겠어.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푼수 같고 창피하니"
라며 웃었다.
그제야 이 집이 엄마에게 큰 자부심이자 자랑이었구나 싶었다. 남들 넓은 아파트 전세가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의 작은 빌라지만 자식이 처음으로 스스로 산 집.
그 집에 3개월 만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한동안 울음을 삼켰다. 혹시라도 구박당하진 않을지 나만 찾고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쉽사리 그쳐지지가 않았다. 엄마의 아이 같은 웃는 얼굴이 가슴에 박혀 그렇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