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가 있으신가요?
점심 시간이 되었다. 팀장이 나를 부른다.
"허대리 1분기 영업실적 보고서 만드느라 고생 많지? 내가 점심 때 맛있는거 사줄께. 뭐 먹고 싶어?"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그러지 말고, 먹고 싶은거 말해봐."
"진짜 다 좋아요!"
"그래. 뭐 그렇다면"
팀장이 나를 데려온 곳은 횟집이었다. 나 날생선 안 먹는데.. 왜 그 얘기를 진작에 안했을까..
유난히 내 생각을 입 밖으로 잘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행여 내가 이 말을 하면 내가 비웃음 당하지는 않을지 늘 노심초사한다.
유난히 결정장애가 심한 사람들도 있다. 연인과 함께 식당을 찾을 때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해 온 동네를 10분 넘게 빙빙 돌아다닌다. 식당에 들어와서도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해 메뉴판만 5분째 뚫어져라 응시한다. 뱃 속에 들어가면 다 똑깉다는데, 그럼에도 나는 좀처럼 결정하지를 못한다..
늘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게 좋기는 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 뒤의 말은 웅얼웅얼 들리지 않게 말하거나 침묵한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건 확실한건 같은데 말을 안하니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왜 자기 주관이 없고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걸까?
이들에게 본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남들이 어떻게 나를 바라볼지 늘 걱정한다.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는 것이다.
"난 점심으로 시저샐러드가 먹고 싶은데 그런 말하면 혼자 튄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이 식당 가자고 하면 다른 사람 의견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한다고 나를 욕할지도 몰라"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이들은 자기만의 생각이나 취향이 강하거나 눈치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독특하다, 특이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왔기에 그게 상처로 남은 것이다. 자기 개성이라고 치부하기엔 이 사회가 너무 그런 사람들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내 생각을 숨기게 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없는 경우가 실제로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럴까? 내 관심사가 전혀 아닐 때이다.
정신과 의사인 배우자가 갑자기 나에게 정신과 처방약으로 콘서타를 쓸까 아토목세틴을 쓸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하자. 나에게는 평생 들어본 없는 외계인 언어처럼 들릴 뿐이다. 당연히 나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나는 모르겠어. 당신 좋을대로 해"
내가 어디서 먹을지, 어디로 놀러갈지가 내 관심사가 전혀 아니면 그냥 남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는 노름에 빠져 사는 윤창식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어느 날 일본에서 전보가 도착한다. 둘째 아들 종학이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구속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인이 그 전보를 노름판으로 갖고 왔지만 창식은 대충 쓱 읽어보고는 다시 노름에 빠진다.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자세도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그만큼 내가 다른 일에 정신이 빠지게 되면 다른 일들이 다 귀찮게 느껴지게 된다.
동창 모임을 생각해보자. 항상 모임을 주도하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한 두번 못 간다고 이야기하면 그 뒤부터는 오라는 연락도 뜸해지다가 아예 끊어지게 된다.
내 의사표현이 분명하지 않을 때도 이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 만만한 사람이 되기 쉽다. 내가 무엇을 결정하던 불만이 없고, 싫은 소리, 무리한 부탁을 해도 찍소리도 못하는 호구 이미지가 박히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밑지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이런 만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고도 승진이나 좋은 고과에서 밀려나기 쉽다. "쟤는 내가 이렇게 평가해도 불만이 없으니 괜찮아!" 이런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개미 목소리 마냥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아니라 일부러라도 크게 말하자. 발음도 또박또박 말하자. 만일 내 발음이 부정확한 편이라면 단어를 조금씩 끊어 강조해서 말하자. 그리고 말끝을 흐려서는 안된다.
"오늘 다른 약속이 있기는 한데.."
"이게 맞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좋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 끝까지 분명하게 말하자.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 회식 참석은 어렵습니다."
"이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고 봅니다"
(X) "지난 분기보다 실적이 감소한 것 같습니다"
(O) "지난 분기보다 실적이 감소하였습니다."
추측을 나타내는 '~같습니다' 가 아니라 단정적 표현인 '~입니다'를 쓰자. 만일 더 확인이 필요하다면 미리 확실하게 파악하고 말하자.
(X) "요즘 물가가 많이 올랐더라고요"
(O) "요즘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했더라고요' 는 불확실한 상황을 전달하는 의미가 있다. 확실한 표현인 '~했습니다' 를 쓰자.
내가 원하는게 있다면 분명하게 이야기하자.
"저는 난에 카레를 찍어먹는 인도요리를 좋아하는데, 저랑 같은 취향을 가진 분이 혹시 있으실까요?"
특별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아래와 같이 말해보자.
"저는 날 생선만 제외하면 음식 안 가리고 잘 먹습니다. 이 주변 식당을 잘 모르는데 과장님께서 추천해 주실래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을, 없다면 그 가운데서도 내 취향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해 보자. 상대방은 나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보고 쉽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거시기 해라"
이 한 마디로 상대방이 척 알아듣는 일은 없다. 구체적으로 내가 말해야 상대방도 내 생각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자.
당신이 남들보다 조금 독특한 취향이 있을 수도 있다. 독특한 사고를 할 수도 있다. 튀면 손가락질 당하는 한국의 문화에서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눈치 없다는 소리,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자. 다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 아니다. "점심 어디서 먹지?" 팀장이 물어보는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호텔 뷔페요!" 이러면 곤란한 것이다. 그 상황을 고려해서 분명하게 내 입장을 말하자.
처음이 힘들지 말이라는게 자꾸 하다보면 익숙해진다. 용기내서 분명하게 말하는 법을 실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