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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탈선(Derailed)

부제_The Ghost in My Mind #12

by 이안류


그날 하루 학원의 일정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라리 수업 시간은 편했지만 작은 학원에서 서로의 긴장감은 너무도 쉽게 공기로 감지되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억울했고 황당했고 분노했고 초라했고 수치스러웠다. 수업을 핑계로 그 순간에 나를 방어하지 못하고 도망친 나 자신을 경멸했다. 이런 마음으로 같이 퇴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화났음을 알리려 퇴근을 갑자기 따로 하는 것도 우습고 미봉책에 불과했다. 학원에 울려 퍼지는 X의 목소리와 모든 말들이 나에게 오만가지 생각들과 의심들을 불러 일으켜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만하자’, ‘아니야, 지금까지 해왔잖아. 이번만 넘어가면 돼. 그렇게 지내왔잖아. 아깝잖아.’ 내 마음이 두 갈래 길을 앞두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어느 것도 나에게 명확한 답이 되지 못했다. 무엇을 선택해도 폭풍은 피할 수 없었다. 내 안의 폭풍이든 우리 사이의 폭풍이든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고통스러울 일이었다.




한동안 말을 안 하니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아니면 나의 고질적인 회피 본능 때문이었는지, 수업이 끝난 후 나는 별 의미 없는 말을 건네며 X와 함께 퇴근하는 선택을 했다. 차 속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지만 나는 점점 수업 전의 언쟁을 무마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마치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X도 눈치껏 일상적인 학원 이야기를 던지며 그렇게 차는 조용히 달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X의 대화 주제에 감정이 요동쳤지만,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삼키며 나를 따라오는 달빛에 의지하며 오늘을 넘어가려 했다.




이야기는 끊어질 듯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나는 시간을 메우려 최근 중학교에서 수업했던 일을 무미건조하게 읊조리고는, 요즘 학교 분위기들에 대한 느낌을 검푸른 앞유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한숨처럼 흘렸다. X도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요즘 분위기가 좀 그런 것 같아. 저번에 언니 내가 수업했던 학교 있잖아. 거기도 그러더라고.”

나는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지쳐서 더 이상 큰 문제를 내가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비겁하더라도.

“그런데 언니, 저번에 수업했던 학교,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수업을 잘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와서 다른 수업을 해달라고 하는 거야. 나도 듣고 놀랐잖아. 정말 MBTI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이었는데, 뒤에서는 너무 재밌었다고 말들을 그렇게 했다고 그러더라고.”




Pieter Mulier(1690). Storm in the Sea - Web Gallery of Art: Image Info about artwork



그다음에 무슨 말을 X가 더 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은 여기가 끝이다. 그다음부터는 아득한 소음이었다. X는 이 말들을 덧붙이지 말아야 했다. 나는 X가 또다시 발동을 거는 칭찬을 요구하는 말들에 숨이 급격히 막혀왔다. 그냥 1절만 하면 되는데, 결국 자기 이야기, 은근한 자기 과시, 자화자찬으로 또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늘 그랬듯 X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듣다가 과하다 싶으면, 농담조로 혹은 때로는 뼈 때리는 말로 “잘했다는 칭찬이 그렇게 듣고 싶었어?”라고 내가 물으면 X는 웃으며 “응, 듣고 싶었어.”라고 답했다. “이제 그만 좀 하자. 그래, 너 잘했어. 대단해.”라고 약간은 짜증 섞인 투로 말하면, “우리 사이에 이런 말도 못 하냐?”라고 X는 응수했었다. 어느새 나는 X가 인정을 바라는 말을 듣도록 은연중에 빌드업하는 의사소통에 지쳐있었고 무기력해졌다. 그런데, 오늘, 그것도 이 상황에 맥락 없이 또 등장한 것이다. 나는 오늘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너무 지쳐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죽을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X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랑 좀 그만하면 안 되니?”

차는 우리 집 근처를 달리고 있었고, 내 목소리는 낮게 지쳐 있었다. 내 가슴은 조용히 쿵쾅거렸다. 차 안에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이미 잔은 엎질러졌다.

“언니, 자랑 듣는 게 불편해?”

X의 목소리가 변했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낮지만 팽팽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X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 맞다고 나에게 시인하는 것인지, 나는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자랑 듣는 걸 누가 좋아해? 그냥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에서 멈추면 안 되니, 그렇게 꼭 내가 수업 잘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라는 말까지 꼭 가야 됐냐고?”

“나 자랑한 거 아닌데, 언니. 그냥 말한 건데?”

“그냥 말한 거라고? 수업 잘한다고 '파다하게'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까지 나서 다른 수업도 해달라고 연락 왔다고 말하는데 이게 자랑이 아니라 그냥 하는 말이라고? 그냥 하는 말이라면 이전에 수업한 데서 다시 수업해 달라고 연락 왔어라고 하지, 누가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는 말을 앞에 붙이니? 나 네가 이런 말 할 때마다 지쳐. 나 너한테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는 말 하는 거 정말 지친다.”




한번 봇물이 터지니 나는 그동안 담아 온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더욱이 X가 자신의 말이나 의도를 부인하는 반응을 보이자, 나는 더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었다.

“난 칭찬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아니, 난 언니가 칭찬 말고 다른 말을 해주길 바랐어.”

“뭐라고? 칭찬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고? 그럼 잘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다시 수업해 달라고 연락받았다는 사람에게 칭찬 말고 무슨 말을 해주니?”

“난 언니가 그냥 내 얘기를 듣고 언니 생각을 말해주길 바랐어. 언니가 그래서 ‘잘했어’라고 말할 때 서운하기도 했어.”

난 내 정신줄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대화는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내가 알던 똑똑한 X는 이상한 논리를 펴며 다시 원인을 나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자신은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내가 말길을 잘못 이해하고 칭찬을 해줘서, 자신은 오히려 서운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착각한 것은 나라는 것이었다.




내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결국 우리 관계 불화의 원흉은 나였다고 X는 말하고 있었다. 그간의 서운함을 토해냈지만, 나는 결국 예전에 X가 상하 관계를 구분 못한다고 비웃던 어떤 사람처럼, 내가 X에게 고용된 사실을 깜박하고 아직도 친한 언니 행세를 하며 대접받으려는 개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가 X의 프로젝트에 한 부분을 맡아 참여하고 있으면서 X를 따르는 다른 참여자들처럼 열렬히 반응하지 않는 조직의 서열 개념도 모르는 무뢰한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참담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원흉으로,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 생각도 못했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X의 제안과 설득을 도움이나 배려로 생각하여 하나씩 수락했더니, 어느새 나는 X의 미래 비전을 위한 일개 톱니바퀴가 되어 있었다.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계획은 어느새 공중에서 분해되고, 나는 열심히 X의 미래를 위해 달리고 있었다. 내가 거래한 것은 단순히 시간과 돈이 아니었다.




“나는 너처럼 앞으로 미친 듯이 열심히 살고픈 생각 없어. 그럴 체력도 없고. 이미 젊을 때 할 만큼 해서 다시 그렇게 달리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난 그냥 나에게 맞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엄쉬엄 살고 싶어.”

진심이었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우리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언니? 앞으로 죽어라 달려도 5년이야. 그때까지 열심히 하면 돈도 더 모으고, 그러고 나서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잖아. 나는 언니랑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 정말 많다고. 원하면 나중에 언니가 하고 싶은 거 사무실에 팀으로 만들어도 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노력한 게 있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언니랑 정말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많단 말이야.”




X는 차 앞유리를 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빠른 말로 마치 나에게 주문을 걸 듯, 우리가 함께 하면 앞으로의 미래가 어떨지 속사포처럼 토해냈다. 나는 이미 숨을 술 쉬 없었고, 영영 이 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나는 이미 지쳤고, 너와 나는 갈 길이 다르다고 울면서 말했지만, 내 말은 X에게 닿지 않았다.



그건 내 꿈이 아니야. 그건 너의 꿈이지 내 꿈이 아니라고. 네 꿈에 나를 넣지 마. 우리 일이라고 말하지 마.

X의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우리의 미래를 파탄 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X가 말하는 것은 X가 바라는 꿈이지 내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X는 우리의 꿈이라 말하며 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그것이 소름 끼쳤다.

“내가 정말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무슨 일 생기면 제일 먼저 가서 언니한테 말하잖아. 언니랑 일하는 게 얼마나 좋았는데. 나는 정말 언니랑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단 말이야. 정말 많았단 말이야.”




X는 이제는 거의 울부짖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놀라고 당황했다. X의 울부짖음은 나를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옆에서 계속 내 꿈은 아니라고 말하고, 나는 지쳤다고 말하는데, X는 나를 위한 그 어떤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너져가는 자신의 꿈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꿈이 나랑 함께하는 것이었다며 여전히 나를 설득했고, 자신은 함께 하려고 했으나 먼저 깨버린 사람이 나라고 벌(罰)하였고, 나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로 X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내게 죄책감을 주었다. 역시 똑똑한 친구였다. 하지만 슬픔에 빠진 나를 조금도 돌아보지도 않고, 무너져 가는 자신의 꿈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X를 보며 오히려 나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 목표를 향해 잘 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만신창이로 선로에서 이탈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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