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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내가 거기에 있었다

부제_The Ghost in My Mind #13

by 이안류



그날 이후 나는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몸에서 부르르 진동이 느껴져 놀라기도 했다. 머릿속에 차 안에서 나누었던 수많은 말들이 두서없이 떠다니고 메아리가 쳐서 나는 잠을 이룰 수도 정신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멍하니 시체처럼 집안을 서성거렸다. 생각이 많은 건지 없는 건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이제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슬픔만 붙들고 있기에 X와 이미 얽힌 일들이 많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더욱 갑갑했다. 진실한 내 마음은 X와 관련된 일에서 일단 다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나의 잠재적 불안을 잠재우려 X에게 걸쳐둔 일들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나를 계속 짓눌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아직 부족했다. 아직 학원에 출근하려면 며칠이 더 남아있어 다행이었지만, 정말 머릿속이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지도교수님을 뵈러 학교에 갔다. 이전에 미리 스케줄을 잡아둔 상태라 나는 마음도 정리하고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교수님 연구실을 방문했다. 간단하게 문안 인사를 드린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문득 몇 달 전에 받았던 최면 상담에 대해 말씀을 드리게 되었고, 교수님은 매우 흥미로워하시며 상담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꼼꼼히 물어보셨다. 솔직히 유사 상담을 받았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교수님은 이것도 당연히 교육 분석이 될 수 있다며 나의 우려를 잠재워 주셨다. 나는 잊고 있었던 그날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 신나게 교수님께 그때 일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교수님은 들으시면서 코멘트도 해주시고 힘들었겠다고 위로도 해주셨다.



학교에 올 때까지만 해도 X와의 일로 마음에 돌 하나가 있는 것처럼 무거웠는데, 나는 어느새 밝고 편안한 표정으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사 수료를 하고 나니 한동안 좀 헛헛하고 덧없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씀드리자, 교수님께서는 나와 같은 성격이면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공감해 주시며, 그 마음은 논문을 쓰면서 채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여러 감정이 들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친구 M이 떠올랐다. 공동연구 중인 연구계획서의 그다음 일정에 대해 간단히 논의한 후, 인사를 드리고 연구실에서 나와 캠퍼스를 걸었다. 친구 M도 교수님도 똑같은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혼란스러울 때는 논문을 써.





나는 시청역으로 향했다. 예전에 회사가 시청 근처에 있어서 이곳을 정말 자주 다녔었고, 이후에도 미술관이나 공연을 보러 왔던 내 젊음의 뜨거운 체취가 남은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2호선 지하철 시청역을 나와 태평로를 따라 쭉 걸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왔더니 외국인들이 더 많아졌고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길거리 네온 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저녁 노을이 스며든 세종로 주변은 익숙하게 아름답고 눈부셔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늦은 저녁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계속 걸었다. 광화문 광장을 가로지르고 처음 본 조각상들과 설치 미술들을 감상하며 내가 예전에 있었던 곳의 향수를 만끽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 눈물이 났다.



친구 M도 교수님도 나에게 논문을 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연구를 좋아해서 박사 과정에 입학한 것인데, 어느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놓치고 있었다. 나를 잃어버려서 아무도 나에 대해 묻지를 않았다. 그래서 친구 M이, 교수님이 나에 대해 물어보고, 관심을 가져주니 눈물이 났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내가 나를 놓치자 남도 나를 봐주지 않았고, 나는 사라져 갔다. 나는 타인의 미래 계획의 부품으로 편입되어, 이것이 내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설득되고 있었다. 광화문 거리에 서서 짙푸른 밤하늘을 바라보니 숨이 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걸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걸었다. 어디를 걸어도 나는 이곳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 안을 환기시키고 나니, 그제야 나를 짓누르고 원인 모르게 부르르 떨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사과를 받고 싶었다. 적어도 그날 수업 전, 나에게 분명 화풀이를 했던 X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날의 시작은 분명 X였는데, X는 그날 내내 학원에서도, 차 안에서도 내 탓을 했었다. 나는 커피 두 잔을 사서 간 것이 전부였는데, 모든 불화의 원흉이 되어 있었다. 내 안에 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내재되어 있었고, 미처 분출되지 못하고 억눌렸던 감정의 마그마는 순간순간 나를 진동시켜 몸서리치도록 만들었다. 나조차 못 본 척했던 억울함이 내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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