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_The Ghost in My Mind #14
학원에 출근하는 날,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X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과를 받고 나야 이후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계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급한 마음에 나는 출근을 서둘렀고, 늘상 그렇듯 학원에 제일 먼저 출근하여 X를 기다렸다. 그런데 X가 전화를 했다. 나는 약간 멈칫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귀가 너무 아파서 이비인후과를 들렀다 가야 해서 좀 늦을 거야. 소리가 잘 안 들려, 울려. 학생이 일찍 오면 언니가 좀 챙겨줄래?”
X는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맥이 풀렸다.
“응, 알았어. 그런데 X야 끝나고 우리 얘기 좀 하자.”
나도 담담하게 말했다. X는 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이 방식이 너무 유치했다.
학원에서 스치며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X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귀가 아프고 웅웅 울리니까 조용히 말하라고 고함쳤고, 작은 학원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그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대충 퇴근 준비를 한 후, 우리는 학원 휴게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막상 마주하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건데? 해봐.”
X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앉아서 낮은 어조를 말했다.
“휴우, 막상 이야기하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정말 나는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고 한숨만 나와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X가 말했다.
“설마 내가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X는 내가 틈을 보이자 바로 잽을 날렸다. 자신이 나에게 상처받았다는 것을 먼저 강조했다. 이비인후과에 다녀온다는 말도, 지금 이 말도, X는 나에게 미리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도록 유도함으로써, 내 죄책감을 들추고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호작용 방식은 나를 짜증나게 했고, 나의 화를 돋우어 결단을 하도록 부추겼다.
“나는 너한테 사과를 받고 싶어. 그날 네가 출근하자마자 나한테 짜증을 냈잖아. 나 정말 화가 났는데 참았었거든. 그런데 그것에 대해 사과받고 싶어.”
“내가 짜증 냈다고? 언제? 그날 출근해서? 난 짜증 낸 적 없는데?”
X는 모르는 이야기라는 듯 말했다. 나는 솔직히 놀랐고 어이가 없었다. 예상 못한 답변이었다.
“네가 출근하자마자 담당자가 이벤트 다시 수정하라고 했다고 계속 짜증 냈잖아. 나는 그동안 너를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이벤트에 쓸 도구를 찾았는데 너는 마음에 안 든다며 계속 툴툴거렸고. 나 정말 그날 황당했어. 오자마자 말투도 표정도 툭툭하면서 나한테 말하는데 기분 나빴다고.”
“나는 그날 정말 짜증 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계약해서 기뻤어 흥분했고. 내가 기뻐서 좀 흥분한 걸 언니가 짜증 났다고 봤었나 보네.”
나는 말문이 막혔다. 황당하고 열이 받아서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 X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X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는지 기가 찼다.
“오히려 기뻤다고? 흥분했다고? 내가 너를 봐온 시간이 얼만데, 네가 기뻐서 흥분한 거랑 짜증 난 거랑 구분도 못한다는 거야? 그것도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아서, 내가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봤는데 그것도 구분 못하고 착각한 거라고? 네가 기뻐서 흥분한 건데 나는 네가 짜증 냈다고 혼자서 씩씩거린 거라고? 너 장난하니? 이건 좀 아니지 않아? X야, 나 너를 7년을 알아왔고, 상담사야. 사람 말할 때 표정, 비언어적 메시지 다 체크하도록 훈련받은 상담사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내가 흥분이랑 짜증 난 것도 구분 못해서 그날 그랬다는 거야?”
우리의 이야기는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나는 또다시 예상도 못한 대답에 흥분하고 화가 나서 이게 뭔가 싶었다. 오늘 출근할 때 나는 X에게 사과를 받고, X의 사업에 참여한 부분은 최대한 빠지거나, 빠질 수 없는 건은 이번만 하고 더 이상 함께 일하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했었다. 학원은 X보다는 원장님과 계약한 부분이 있어서, 그래도 1년은 다녀야 하니 원장님과 상의를 해서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첫 장부터 벽에 부딪혔다. X는 이번에도 내가 착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흥분하고 기뻐한 것이지 짜증을 낸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짜증 낸 건 아니지만 언니가 짜증이라고 느꼈다면 사과할게.”
이 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너의 말대로라면 내가 또 착각한 거네. 또 내 탓이야. 저번에 차 안에서도 넌 계속 내 탓만 하는데, 그런데 나를 왜 만나니? 나를 제일 좋아한다며?”
나는 X와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는 계속 되돌아와 나에게로 향할 것이었다. 나는 이 관계의 절대 악(惡)이었다. 그런데 X는 왜 나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미래에 나를 끌어들였을까? 나의 효용 가치를 X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가? 그 후 또다시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들이 오고 갔고, 오히려 차 안의 상황 보다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차 안에서 울부짖던 X는 귀가 아파서 그런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대단히 침착하게 내 말의 허점을 공략하였고, 나의 착오라고 말했다.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동안의 시간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