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_The Ghost in My Mind #21
그리고 나는 수치스럽게도 깨닫는다. 요즘 X의 생각이 떠오르는 이때의 나를 보며 X가 내 삶에서 그간 해왔던 역할과 기능을 알아차린다.
한동안 논문과 갑자기 몰렸던 생업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던 나는 요즘 좀 한가한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는 만큼 돈을 버는 프리랜서의 특성상, 한가함은 부족한 수입을 상징한다. 나는 핸드폰 스케줄러를 보며 이전 달보다 공란이 많은 달력에 조바심과 불안을 느꼈다. ‘뭘 더 하면 좋을까?’ 여러 고민을 해보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날이 며칠 지나면서 나는 문득 X를 떠올렸던 것 같다. 나는 X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요즘 들어 생각나고,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내가 누군가와 이별한 후, 어떤 상황에서 그 사람을 그리워했던가. 예전에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몇 달 후, 나는 어두운 퇴근길을 전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며 울면서 걸었다. 그날 유독 학원에서 수업도 고됐고 다사다난하게 힘든 하루를 보냈었다. 그리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눈물이 났다. 예전 같으면 전화를 걸어 힘들었다고 칭얼거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 없었다. 밤늦은 퇴근 시간, 전화 걸어 울면서 투정 부려도 받아주었던 사람이 바로 전 남자 친구였다. 그 빈자리가 나는 서러워 엉엉 울면서 창피함도 모르고 걸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살냄새가 맡고 싶을 때 보고 싶었다. 어린 나에게는 할머니 품은 세상이었기에, 그 작은 품 안이 그리울 때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꼭 이별이나 사별한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는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마음속의 복잡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거나 의논하고 싶을 때 친구 M이 보고 싶다.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 벅찰 정도로 힘들어 그저 ‘나 힘들어’라는 말만 하고도 누군가에게 푹 안기고 싶을 때 셋째 언니가 보고 싶다. 논문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스하고 안정감 있는 어른의 조언을 듣고 싶을 때 지도교수님이 떠오르고, 정말 이 정도면 상담받아야 되나 싶을 정도로 정신상태가 엉망일 때는 나의 주슈퍼바이저 교수님이 생각난다. 그런데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살짝 불안을 느낄 때 나는 X를 떠올렸다. 그랬다.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나는 가끔 X가 제공해 준 일이 내 숨통을 조금씩 풀어줬던 그 기능과 역할이 그리웠던 것이다. 난 ‘벌어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헤어졌으면서도, 그 공백이 생기자 X를 떠올린 것이다. 참 못났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X도, 나도 서로에게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함께 웃고 울고, 위로하고 기대며 나눈 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한 ‘관계의 목적’이 조금씩 어긋났고, 감정의 교류보다 기능과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일정한 역할과 기능을 내포한다. 하지만 우리가 불편해진 건, 이 관계가 기능만 남고 마음이 사라졌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체감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으로 ‘정서적인 관계로 시작한 사람이 경제적 역할로만 기억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씁쓸함이 꽤나 오래도록 남는다. X와 나눈 나의 삶에서 소중했던 기억들이 그렇게 기능으로 치환되어 정리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X 정도의 친밀감을 나눴던 친구와 거래나 사업을 해본 적이 없고, 이별은 대개 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던 친구의 부재라는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경험과 감정은 너무도 낯설다. 그리고 내가 X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슬프고, 내가 경제적 고민이 없으면 X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서글프다. 그래서 더더욱 이 관계를 글로 새겨두고 싶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 그 공백을 단순한 이익의 기억으로만 덮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다.
나는 알고 있다. X와의 관계는 나를 지치게 했지만, 내 안의 감정과 관계 방식을 직면하고 성찰하여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이 관계를 애도하는 작업은, 단지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면(一面)을 마주하고, 내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