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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문

by 재스비아

들어서는 말을 조금 무겁게 시작한 것 같지만,
제 손에 들어온 이상, 이 에세이 또한 저의 헛소리 일기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며 시작합니다. 많관부.


처음 병원을 방문하면 태블릿을 통한 약간 긴 설문지를 작성하고, 면역체계 검사(? 단어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를 한 후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대기 시간, 진료 시간 전부 포함해서 거의 두 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몇몇의 후기와 다르게 전부 친절하셨다. 어딜 가든 친절하지 않은 간호사 선생님들을 아직까진 못 만나보긴 했지만, 이곳은 특별히 더 친절한 느낌. 입구 컷 당할 뻔했는데 다행이다.


설문지를 작성하는 것만 해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증상이 심한 건지 약한 건지 판단이 안 섰고, 제시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선택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당당하게 제출 버튼을 눌렀다.

‘이 자식 이거 뭔지도 모르고 선택했구만.’ 이러면서 의사 선생님들이 알아서 감별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대기 후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제출한 자료를 보시며 병원에 오게 된 최근의 계기와 자란 가정환경 등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곤란하기 짝이 없는 최고난도 질문이다.


병원만 아니면 “니 뭔데. ㄲㅈ.” 과격한 마음주먹 화법이 나올 것 같은 질문이지만, 의외로 그냥 대답이 나왔다.


아, 최대한 성실하게 답하려 노력했지만,

질문 방향을 자꾸만 헛돌면서 그냥 본인 하고 싶은 이야기만 두서없이 중구난방으로 내뱉긴 했다.


의사 선생님 눈빛이 몹시 몹시 피로해 보이셨다.

하지만 가공할 만한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저 멀리서 관망하듯 들어주시기만 한 건 아니고, 적절한 표정과 제스처를 활용하여 몰입해 주셨다.


어렵게 각오하고 가게 된 만큼 스스로 높여놓았던 질문에 대한 허들을 내려놓았던 것도 있고,

힘든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도움을 주시려고 한 의사 선생님 덕분에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하다.


하지만!


원래도 질문이 들어오면 즉각 반응하지 못하는 탓에 당황이 잔뜩 묻어난 루저 화법으로 말을 하는 편이다.


정신병원이라는 일상을 벗어난 장소, 무언가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전문가.

그 두 가지가 주는 중압감 때문에 쌓아놓은 사회적 짬바로도 찐따스러움을 더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제대로 찐따 티를 내고 왔다.

그런 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쓸데없이 일관성 있다...


평소와 달리 침착한 척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미친 듯이 꼼지락거리고 귀신 들린 듯 눈알을 굴렸다.

무언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육아 난이도 최고 높은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이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얼굴을 휴지 구기듯 일그러뜨리고 울다니.


말과 단어 하나하나 초등학생 때나 쓸 법한 유치하고 과격한 것만 골라 쓰기까지. 친구 앞도 아닌데.

와 씨!!! 와!!!!!!!!!!!!!!!!!!!!!


추잡하고 창피한 기억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덕분에 처방된 약을 먹어도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본인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도 실수를 연발하고,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루저일 필요가 있을까, 사람이!!!!!


그리고 휴지도 안 여쭤보고 막 썼다. 눈앞에 있길래. ㅎㅎ;

다음 방문 때 죄송하다고 해야겠다.


또 너무 첫 진료에 말을 넘치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날것으로 이야기했나 싶기도 하고...


이따위 생각 끝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더 많은 기억, 더 많은 괴로움, 좀 묵은 죄책감까지 고개를 든다.


또 숨을 멈춘다.


다음 방문 때는 변명을 섞은 고해성사를 해도 될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는 거지?

의사 선생님은 영화 속에 나오는 신부님이 아닌데.


약 기운이 돌고, 생각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충분치 않아.


치료가 시작되고 상처가 날뛴다.

시작과 동시에 고비를 맞은 것 같다.


끝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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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 × 정신건강의학과 ○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기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떨었던 저여서 두려워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두렵지만 가보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보험가입과 또 어딘가 불리하다는 말이 있어 찝찝함을 남기지만, 미리 가입하고 가거나 그냥 가입을 포기합시다(?)

건강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ㅜ

그리고 꼭 후기를 잘 찾아보고 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나마 좋은 평이 많은 곳으로...

전 넘나 멘탈 바사삭이라 나름 열심히 봤어요...


한 군데서 상처받았다고 안 가기 없기예요!

이것은 저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첫 방문이라 상처받을 일은 없었고, 오히려 쌉 소리로 상처를 주고 온 것 같지만요.


근데 얼마나 다녀야 괜찮아질까요..?


병원은 어디든 오래 다니기 싫은 이 마음, 숨길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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