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기회도, 탈출구도 없는 애매함의 시기
직급은 과·차장인데,
일은 팀장의 책임감을 요구받고,
결정권은 없다.
중간레벨.
그 말엔 늘 '애매함'이 묻어 있다.
이직 시장에서는 “과·차장 이상은 연봉이 높다”며 꺼려지고,
사내 승진 체계는 “윗자리가 비어야”만 올라갈 수 있다.
어느 정도 할 줄은 아는 사람이지만,
아직은 윗선이 관리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도 저도 아니다.
위로는 눈치, 아래에선 리더십.
정작 자신은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애매한 시기는
평가받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시기다.
그게 바로 중간레벨의 함정이다.
나도 그랬다.
회의에서는 의견을 내야 했고,
후배에게는 멘토가 되어야 했고,
팀장이 부재일 때는 대리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막상 연봉인상은 미비하고,
평가에서는 무난하다는 피드백만 돌아왔다.
조직은 그 시기를
성숙의 구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시기에 더 가깝다.
열심히 일해도 눈에 띄지 않고,
의견을 내면 부담스럽다 하고,
침묵하면 존재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이름도, 성과도 남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채운 사람, 없어도 되는 사람.
그게 나였던 때가 있다.
많은 커리어 조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라.”
“변화는 도전하는 사람의 것.”
“열정으로 돌파하라.”
그러나 정작 회사 안에서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당신은 금세 튀는 사람, 눈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조언은 멋있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기존 질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움직이라는 말은
사실상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사람들은
무너지거나, 견디거나, 감정을 지운다.
중간레벨이 감당하는 감정노동은 대개 다음과 같다 :
위로는 상사의 기분을 맞추고,
아래로는 후배의 성장을 책임져야 하며,
옆으로는 동료들과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성과가 아닌 감정만 남는다.
그래서 중간레벨은 쉽게 지치고,
쉽게 고립된다.
그렇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인 물”이 되어간다.
나는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작고 확실한 세 가지를 실천했다.
하나,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는 것.
둘, 할 수 있는 일은 주저하지 않고 해 보는 것.
셋, 일이 아니라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멈추고 있지 않다는 걸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열정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조언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방향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중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
승진은 불투명하고,
이직은 리스크가 크고,
잔류는 점점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은
나조차 나를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뭐였더라?”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래서 작게나마 다시 시작했다.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증명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관리자는 아니지만 책임은 있고,
리더는 아니지만 리더십은 요구된다.
그 모순 속에서도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감정을 먼저 지켰다.
존재감을 만들기보다
존재를 지키는 방식으로
다시 시작했다.
중간레벨은 함정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다.
멈춘 게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다만, 그 속도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중간레벨의 또 다른 함정은
성과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보고서는 만들었지만 팀장이 대신 발표했고,
문제를 해결했지만 '다 같이 한 일'로 묻혔다.
누군가 “고생했어” 한마디 하면 끝.
기록도, 흔적도, 숫자도 남지 않는다.
성과를 말하면 자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숨기면 무난하다는 평가가 돌아온다.
둘 다 결국, 사라짐이었다.
조직의 평가는 대부분 보여준 성과 중심이다.
하지만 실제 업무의 상당 부분은
드러나지 않는 가치에서 나온다.
이 불균형이 오래가면,
무력감 → 소진 → 자기 검열 → 더 안 보이는 악순환이 된다.
그래서 나는 기록했다.
숫자로, 한 줄 보고서로,
심지어 내 메모장에라도.
성과 마케팅은 정치가 아니라 생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