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크기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by 또는


제주에 와서 집을 지었다. 그것도 대저택.

300평 대지에 넓은 집을 지었으니 그야말로 대저택이었다.

4인 가족이 살기에는 방이남아도는 그 곳을 남편의 똘끼와 나의 무덤덤함으로 어떻게 보면 무모하게 저지른 작품이었다.


남편은 제주에 올때 부터 주택을 원했다. 하지만 출장 나가고 남아있을 딸이 걱정되었던지 친정엄마는 반대를 했다. 나도 주택에 혼자 있기엔 두려움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파트에서 첫 이주살이를 시작했고 남편은 주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땅을 보러다녔다.

둘째가 태어나고 그렇게 찾아낸 땅에 이웃땅 주인이 건축을 하시는 분이어서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할 겨를도 없는 시간이었다.


아파트에 살다가 넓은 집에 살게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1,2층을 주거 공간으로 생활했기에 아이들은 넓은 거실에서 킥보드를 탈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누가 뭐라고 할거 없는 우리만의 아방궁이었다.

놀러오는 지인들마다 부러움을 금치 못했고 나는 대저택에 사는 귀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이래서 넓은집에 살아야 되나보다 라며 한껏 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친정엄마는 집을 지을 때부터 짓고 나서도 한번도 좋아하신 적이 없으셨다. 오히려 집을 짓는다고 할때도 염려에 가득찬 말만 하실 뿐 나는 오히려 기분이 상하기만 했다.

엄마는 원래 유난히 걱정이 많은 분이라 그러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엄마가 불편했다.

하지만 이 넓은 집에서 산지 한해 두해가 지나면서 나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대출을 최대한 당겨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좋지않았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했다. 내 일이 다행히 육아를 하면서도 가능한 일이라 시간적 여유는 있었지만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었기에 늘 쪼달려야 했다. 남편의 월급은 로그인 하는 순간 로그아웃했고 우리는 신용카드는 버리고 체크카드로 생활비를 늘 신경써야 했다.

여기서 남편과 다툼도 자주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작은 일도 큰 싸움이 되었다.

집을 짓다가 많이 싸운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말로 이 집에 들어 올 때 둘이 아닌 혼자 들어올 뻔 했으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기 위해 집을 지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는 것일까?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구나.'


물론 이 집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침마다 듣는 새소리와 이슬을 머금은 초록잎들은 아침마다 내게 감사함을 선물해주었다. 집을 짓고 나서 이내 코로나로 꼼짝을 못했을 땐 집을 지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처음에는 넓어서 좋던 이 집이 내게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넓은 마당의 잔디는 한여름 며칠만 깎지 않아도 숲이 되었고 신랑은 출장을 나가는 일이라 집안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없었기에 마당은 조금씩 방치가 되기 시작했다. 강아지라도 있었으면 넓은 마당을 맘껏 쓸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넓은 마당을 모기의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남편은 처음 지은 우리의 집을 자신만의 실험실로 만들었고 각종 장비와 실험하다만 폐기물들은 눈만 뜨면 내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러다 신랑이 육지로 가버리고 나서는 우리는 그 넓은 집을 셋이서 쓰는 사치를 누리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왜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아파트를 닭장이라며 자신의 아이들은 자유롭게 키우기 위해 집을 지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 아파트를 갈망하게 되었다.

도시에 사는 친언니는 집에 놀러 올때마다 왜 아파트에 살아야 되는지 나를 설득시키기 바빴다. 둘째 태권도 학원 보내겠다고 한시간 수업에 왕복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매일 라이딩 하는 나를 보고 기가찼을 것이다. 대치맘도 아니고 이 시골에서 태권도 학원 가는데 라이딩이라니..

처음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던 말들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사가야겠어."


내 한마디에 남편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부동산에 매물을 등록시켰다.


"얼마에 파실건가요?"


가장 난감한 질문이었다. 이미 오를만큼 오른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서는 낮게 부를 수 없을 판이었다. 그래도 이정도는 받아야 될 거 같아서 얘기를 하니 조금은 당황하신 듯 힘들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실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러다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 집에 뼈를 묻어야 되는걸까. 남편도 없이 말이다.


집문제가 이렇게 나의 골머리를 썩게 할 줄은 몰랐다.

혼자서 나가 사는 남편도 힘들었는지 집이 빨리 팔렸으면 하는 마음이 나보다 더 컸던건지 미신을 믿지 않을 거 같던 남편은 집을 빨리 팔리게 해준다는 소코뚜레를 절실히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런 간절한 마음에도 아직까지 집을 사겠다는 소식은 오지않고 있다.


구글포토에서 또 어김없이 4년전 아름다웠던 순간이라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사온 집에서 우리의 너무나 행복한 모습에 눈물이 다 날지경이었다. 남편과 싸웠을때도 이 집 때문이라고 불평했는데 사진 속의 우리는 이 집에서 너무나 행복해하고 있었다.


남들은 더 넓은 집으로 갈려고 발버둥인데 나는 지금 배부른 소리나 하는걸까.

생각해 보면 내게 필요한 건 넓은 집이 아니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공간, 아이들이 친구들과 언제든지 맘편히 놀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떠나고 싶을 때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여건.

나는 이 넓은 집에 살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 알게 된 것처럼 그 누군가의 삶에 지금의 집이 원하는 삶을 선물해 줄 수 있길.




오늘도 그렇게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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