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투사를 제대로 알기

"네가 저 사람 미워하는 게, 사실 네 문제 아닐까?"

by 홍종민


카페의 어느 오후


늦가을 오후의 카페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노란 비처럼 흩날리고, 실내에는 커피 향과 함께 나른한 재즈가 흐른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특히 글을 쓸 때는 더욱 그렇다.

동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정신분석 대학원 과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그냥 이 공간에 있고 싶었다.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때가 많다. 26년째 같은 집에서 살다 보니 가끔은 낯선 공간이 필요하다.

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라캉의 『에크리』를 펼쳤다. 프랑스어 원문과 영어 번역본, 그리고 한국어 번역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가며 읽는 중이었다. 라캉의 문장은 언제나 난해하다. 마치 의도적으로 독자를 괴롭히려는 것처럼 빙빙 돌려 말한다. 하지만 그 미로 같은 문장들 속에서 가끔 번뜩이는 통찰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이 문장을 읽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에 3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앉았다. 한 명은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진짜 그 팀장 때문에 미치겠어. 나만 보면 무시하는 표정이야."

베이지 코트의 여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정말? 나는 괜찮던데? 오히려 친절한 편 아니야?"

검은 터틀넥의 여성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몰라. 분명히 나를 싫어해. 오늘도 회의 때 내 의견만 무시했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말할 때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어."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심리상담사로 일하다 보니 사람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심리적 패턴을 읽게 된다. 그리고 지금 저 여성의 이야기 속에는 전형적인 '투사'의 패턴이 숨어 있었다.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계속 팀장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고, 손짓도 커졌다. 친구는 중간중간 "그래?", "정말?"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표정은 영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어제는 또 어땠는지 알아? 내가 보고서 제출했는데, 읽지도 않고 그냥 사인만 하더라고. 다른 사람 것은 꼼꼼히 보면서."

"음... 그건 네 보고서가 잘 되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분명히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야."

김 대리와 함께했던 그 시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15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시절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서른한 살이었다.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아침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사무실로 출근했다. 책상 위에는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모니터에는 끝없는 이메일들이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면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메뉴는 매주 바뀌었지만 맛은 늘 비슷했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는 것도 일종의 스트레스였다. 누구와 앉을 것인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가끔은 그냥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서 옥상에서 혼자 먹기도 했다.

우리 팀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독 김 대리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서른세 살이었다. 늘 단정한 옷차림에 깔끔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

처음 그녀를 만난 건 내가 입사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팀에 배치받은 첫날, 팀장님이 나를 김 대리에게 인계했다.

"김 대리, 이 친구 좀 잘 부탁해. 우리 팀 새 식구야."

"네, 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업무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파일 정리 방법, 보고서 작성 요령, 회의 준비 사항 등등. 그녀의 설명은 명확하고 체계적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그녀의 친절함 속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불편함은 점점 커졌다. 특히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랬다. 김 대리는 정말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했고, 주말에도 종종 회사에 나왔다. 기획안을 작성할 때는 몇 번이고 수정을 거듭했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왜 또 수정하는 거예요?"

어느 날 야근을 하다가 물었다.

"충분하다고요? 아직 멀었어요. 여기 논리가 약하고, 여기는 데이터가 부족해요. 그리고 이 부분은..."

그녀는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눈빛이 반짝이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점점 위축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투사의 그물에 갇힌 나날들


"오늘 기획안 봤는데, 여기 좀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느 날 오후, 김 대리가 내 자리로 왔다. 손에는 빨간 펜으로 가득 채워진 내 기획안이 들려 있었다.

"어디가 문제인가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전체적인 흐름은 괜찮은데, 디테일이 좀 부족해요. 특히 이 부분, 타겟 분석이 너무 단순해요. 그리고 여기..."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당한 피드백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서 비난과 조롱을 읽었다.

'또 시작이군. 내가 그렇게 무능해 보이나? 왜 나한테만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거야?'

퇴근 후, 회사 근처 호프집은 늘 북적였다. 스트레스를 맥주로 풀려는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동기들과 둘러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김 대리가 또 내 기획안 갈아엎었어.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그래? 근데 김 대리가 그렇게 꼼꼼한 건 유명하잖아."

준수가 감자튀김을 집으며 말했다.

"꼼꼼한 게 아니라 나를 무시하는 거야. 다른 사람 것은 대충 넘어가면서 내 것만 트집 잡아."

"글쎄... 내가 보기엔 오히려 너를 아끼는 것 같던데? 나는 피드백도 제대로 안 받아본 적이 많아."

옆에 앉은 혜진이도 거들었다.

"맞아. 우리 팀에서 김 대리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너인 것 같아.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답답했다. 왜 다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걸까? 김 대리는 분명히 나를 싫어했다. 아침 인사를 해도 건성으로 받고, 회식 때도 나와는 대화를 피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작아졌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들까? 그녀의 성실함이 왜 나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까?


새벽에 찾아온 깨달음


지난주 새벽, 나는 또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였다. 정신분석 대학원 수업 이후로 이런 날이 잦아졌다. 특히 '투사'에 대한 세미나를 들은 날은 더 그랬다. 교수님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투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처럼, 타인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스크린이 되는 거죠."

옆에서 아내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26년을 함께 산 아내.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김 대리를 다시 떠올렸다. 그녀가 정말로 나를 무시했을까? 아니면...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심리학? 그런 걸로 어떻게 먹고살려고? 차라리 경영학이나 해라."

결국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인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5년을 버텼다. 아니, 버틴 게 아니라 자신을 속였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월급도 괜찮고 안정적이니까 만족해야 한다고.

하지만 김 대리를 보면 그런 자기기만이 흔들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케팅을 사랑했다. 새로운 캠페인을 기획할 때면 아이처럼 들떴고,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부러움? 질투? 아니면... 자기혐오?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다

"당신 왜 안 자고 있어?"

아내가 잠결에 물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대학원 과제 때문이야?"

"응, 뭐 그런 거지."

아내는 다시 잠들었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소파에 앉았다. 거실 창으로 보이는 새벽의 도시는 고요했다. 가끔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15년 전, 나는 김 대리를 미워했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내가 미워한 것은 김 대리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안주한 나 자신이었다.

김 대리는 그저 거울이었다. 내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 내가 포기한 그 모습을 그녀는 매일 보여주었다.

그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투사했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고 믿으면, 내가 나를 무시하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상담실에서 만난 수많은 거울들


이제 나는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5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늦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4년 전 자격증을 취득하고 작은 상담실을 열었다.

상담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각자의 고민을 안고 있지만, 놀랍게도 많은 경우 그 고민의 핵심에는 '투사'가 있었다.

지난달에 만난 40대 주부 A씨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시어머니가 저를 미워해요. 제가 하는 모든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A씨는 한 시간 내내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음식을 해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청소를 해도 구석구석 지적하시고, 아이들 교육 방식도 늘 문제 삼으신다고 했다.

"시어머니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말로 하시는 건 아니지만... 표정에 다 나타나요. 한숨 쉬시는 것도 그렇고, 제가 뭘 하면 인상을 쓰세요."

몇 차례 상담을 진행하면서 A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한 분이었다. 늘 "네가 하는 게 그게 뭐니?" "좀 더 잘할 수 없겠니?" 하며 비판했다고 한다.

"어머니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이었어요. 뭘 해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죠."

그리고 지금, A씨는 시어머니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중립적인 표정을 비난으로, 평범한 한숨을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해석했다. 자신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시어머니에게 투사한 것이다.

또 다른 내담자 B씨는 30대 남성이었다.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울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요즘 아내가 자꾸 야근한다고 해요. 화장도 예전보다 진하게 하고... 분명 뭔가 있어요."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면서 의외의 사실이 드러났다. B씨 자신이 최근 회사 후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아내에게 투사했다. '내가 바람기가 있는 게 아니라, 아내가 바람을 피우려는 거야.'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거울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불편할 때, 우리는 거울을 깨뜨리려 한다는 것을.

일상 속 투사의 풍경들

어제 저녁, 아내와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다. 한 정치인의 비리 의혹에 대한 보도였다.

"저런 인간들이 어떻게 정치를 한다는 거야. 다 자기 배만 불리려고 하는 것들..."

아내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뭐가 웃겨?"

"아니, 그냥... 우리도 가끔 그러잖아."

"뭐가?"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거 말이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내는 잠시 멈칫했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네. 나도 마트에서 할인 상품 하나 더 집어오려고 새치기한 적 있는데."

우리는 타인의 행동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불편할 때 더 크게 비난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처럼.

SNS를 보면 이런 투사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저 사람 또 자랑하네. 관종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SNS에는 행복한 순간들만 골라 올린다. 타인의 자랑이 불편한 이유는 자신도 그런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 세련되게, 더 은밀하게 할 뿐.

오늘 오전, 동네 빵집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손님이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제가 주문한 지가 벌써 20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안 나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받아갔는데!"

직원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손님이 주문한 지는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손님의 표정에서 빵을 기다리는 짜증 이상의 무언가를 읽었다. 어쩌면 그는 다른 곳에서 무시당하거나 기다림을 강요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감정을 엉뚱한 곳에서 폭발시킨 것이다.


라캉이 말하는 투사의 구조


정신분석 대학원에서 라캉을 공부하면서, 나는 투사의 메커니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처음에는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공부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도 모르는 욕망과 불안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너무 잘난 척해"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라캉의 상상계 이론도 흥미롭다. 상상계는 이미지와 환상의 영역이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환상을 통해 본다. 김 대리를 볼 때, 나는 그녀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본 것이다.

또한 라캉은 주체의 분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언어의 세계, 즉 타자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분열된다. 말하는 나와 말해지는 나,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로.

이 분열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야." "내가 소심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너무 적극적인 거야."


나의 증상, 나의 투사


작년부터 나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같은 옷을 두 벌씩 사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마음에 드는 옷이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패턴이 반복되자 아내가 지적했다.

"또 같은 거 두 개 샀어? 이번이 몇 번째야?"

"그냥... 이게 편해서."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시즌이 끝나면 꼭 하나는 버린다는 것이었다. 아직 멀쩡한 옷인데도 불구하고.

대학원에서 개인 분석을 받으면서 이 습관의 의미를 탐색하게 되었다. 분석가는 내게 물었다.

"두 개를 사서 하나를 버리는 것이 무엇을 연상시키나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지나가며 "우리 집에 초상 난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순간. 그때 느낀 복잡한 감정들. 안도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그 느낌.

"혹시 할머니에 대한 양가감정과 관련이 있을까요?"

분석가의 조심스러운 해석에 나는 놀랐다. 하지만 곧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혼외자인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시선에는 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따뜻함과 동시에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거리감.

같은 옷을 두 벌씩 사는 것은 이 양가감정의 표현이었다. 하나는 간직하고(사랑), 하나는 버리는(거부감) 행위를 통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할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투사였다. 내 안의 갈등을 옷이라는 대상에 투사한 것. 옷을 버리면서 나는 할머니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옷을 또 간직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사랑도 지키고 싶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더 이상 같은 옷을 두 벌씩 사지 않는다. 무의식의 메시지를 의식이 이해하자, 그 증상은 사라졌다.


투사를 자각하는 일상의 연습


이제 나는 투사를 자각하는 것이 일종의 일상 수행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보며 화가 날 때, 잠시 멈추고 묻는다. "이 분노가 정말 저 정치인 때문일까? 아니면 내 안의 무력감 때문일까?"

카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짜증이 날 때도 마찬가지다. "왜 나는 저들이 그렇게 거슬릴까? 혹시 나도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만날 때도 이런 자각은 중요하다. 때로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감정이 내담자의 것인가, 아니면 내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역전이'다. 상담사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무의식적 갈등을 내담자에게 투사할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분석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여보, 나 요즘 당신한테 뭔가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이 저녁에 TV 보는 게 왜 그렇게 거슬리는지 생각해봤는데... 사실 나도 쉬고 싶은데 대학원 과제 때문에 못 쉬니까 질투가 나는 것 같아."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봐. 과제는 내일 해도 되잖아."

26년을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서로에게 투사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자각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성장이 아닐까.

투사 너머의 진실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옆 테이블의 여성들은 이미 자리를 떴다.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빈 커피잔만 남아 있었다. 과연 그 여성은 자신이 팀장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 아니면 계속해서 팀장을 미워하며 살아갈까?


나는 다시 라캉의 책으로 눈을 돌렸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 문장이 이제는 조금 더 이해가 된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때로는 투사라는 왜곡된 방식으로. 하지만 그것도 자기 인식의 한 과정이다.

15년 전, 나는 김 대리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나 자신을 미워한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앎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물론 여전히 투사한다. 인간인 이상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 내가 지금 투사하고 있구나"라고.

라떼가 완전히 식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 집에 가야겠다.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노트북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생각한다.

투사는 적이 아니라 선생님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의식의 지도를 보여준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불편하지만 필요한 진실을.

"나, 혹시 지금 내 감정을 투사하고 있나?"

이 질문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 이제는 안다.

카페를 나서며 돌아본다. 저녁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모든 것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투사를 자각한 후의 세상은 늘 그렇다. 같은 풍경이지만 다르게 보인다.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한다. 오늘 저녁에는 아내와 TV를 함께 봐야겠다고. 과제는 내일 해도 된다.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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