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민은 오늘도 평소보다 일찍 ‘더 슬로우’에 도착했다. 요즘은 햇살이 커피숍에 막 닿기 시작한 시간에 창가 자리에 앉아 햇빛을 받는 것이 좋아졌다.
그는 예전처럼 얼음 개수를 말하지 않았다.
도윤은 눈인사로만 주문을 받고,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내렸다.
조용한 커피숍.
조용한 음악.
조용한 사람들.
그러다 문이 열렸다. 지윤이었다. 하민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가 얼른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커피숍 안을 둘러보다 하민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말을 건 것도, 눈인사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예전보다 조금 가까워졌다.
지윤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육아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에세이 한 권이었다.
하민은 무심히 그 책의 제목을 슬쩍 읽었다.
“무너진 날의 위로법”
그는 순간 자기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30분쯤 지나, 지윤이 일어섰다. 그는 그녀가 커피잔을 반쯤 비운 걸 봤다. 지윤은 가방을 메고, 잠시 하민의 테이블 앞에 멈췄다.
“저기요…”
하민은 고개를 들었다. 지윤은 조심스레 말했다.
“지난번에… 자리 때문에 불편하게 해 드린 거 아니었으면 해서요. 그날, 제가 좀 예민했거든요.”
하민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 아… 아니에요. 누구나 편한 자리가 있는 거죠. 오히려 그날 제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죄송했어요.”
둘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좋은 자리네요.”
지윤이 말하자, 하민도 작게 미소 지었다.
“네. 햇살이 조금 좋아졌어요.”
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인사하고 커피숍을 나섰다. 하민은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창가 너머로 조용히 바라봤다. 잠시 후, 도윤이 다가와 커피잔을 치우며 말했다.
“두 분, 드디어 인사하셨네요.”
하민은 당황한 듯 말했다.
“아, 네. 뭐… 그냥.”
“그냥이죠. 대부분 좋은 인연은 그렇게 시작돼요.”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그날 밤, 하민은 “무너진 날의 위로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버티는 중이었구나.’
말은 없었지만, 단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외로움에 금을 내기 시작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