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8

by 슬로우

오후 5시 20분.


커피숍 ‘더 슬로우’의 문이 열렸다. 남자는 조용히 들어와 창가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짙은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손에는 얇은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눈에 띄지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요한 공기가 그를 따라 들어왔다.


처음 본 손님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의 걸음이 어색하게 느려진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느려진 사람들이 가진 속도였다.


“아메리카노, 따뜻하게요.”


목소리는 낮았고, 어딘지 자신과의 대화처럼 들렸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내렸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도 30분 넘게 자리를 지켰다. 책을 펼치긴 했지만,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다시 왔다.


오후 5시 20분.


같은 자리에, 같은 커피를 주문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는 늘 비슷한 시간에 오고, 아무 말없이 있다가, 빈 잔을 치우고 돌아갔다.


일주일쯤 되었을 때 도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퇴근길이신가 봐요.”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늦게 대답했다.


“이젠 퇴근할 직장이 없어요.”


도윤은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실직한 사람에게 실수한 게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서 실직자의 좌절이나 고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은 공허한 농담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진심이었다.


그날, 남자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무심한 듯 물었다.


“혹시 여기… 책 놔두고 가도 되나요?”


도윤은 살짝 당황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기 때문에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게 주시면 제가 책장에 꽂아 놓았다가 다음에 오실 때 드릴게요.”


남자는 살며시 웃었다.


그의 이름은 최문기. 은퇴를 두 달 앞둔 교사였다.


두 자녀는 모두 독립했고, 집에는 자신과 아내뿐이다. 하지만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고, 오히려 조용함이 서로를 더 멀게 만들었다. 퇴직을 앞두고도 축하보다 조용한 무게감이 따라붙었다.


그는 요즘, 자는 시간이 아닌 깨어 있는 시간이 무섭다고 말했다.


도윤은 그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는 이유를 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습관이 아니라 하루 중 가장 사람다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만든 루틴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그가 맡겨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래된 표지, 군데군데 접힌 모서리, 형광펜 자국이 엷게 번져 있었다. 그는 책갈피로 끼워져 있던 포스트잇 하나를 펼쳐보았다. 펜으로 흘겨 쓴 듯 적힌 글씨는 최문기의 것 같았다.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의미가 없다는 게 인간을 무너뜨린다.”


도윤은 잠시 멍하니 책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시 덮었다. 그가 책을 두고 갔던 이유가 진짜 ‘읽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었던 걸까.


도윤은 그와 나눈 몇 마디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제자 얘기를 할 때는 눈이 반짝였고, 요즘은 은퇴를 앞두고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다며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엔 묘한 허전함이 있었다.


“아이들은 다 컸고요. 제 아내는… 이제 저랑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대요.”


며칠 전, 무심한 듯 건넨 말이었다.


‘가정’과 ‘직장’ 두 바퀴로 굴러가던 삶에서, 하나가 멈추고 나면 다른 바퀴도 덜컥거린다는 걸 그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제목이 묘하게 가슴을 때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조차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하물며, 은퇴라는 전환점 앞에서 공허함과 맞서는 지금의 최문기에게 이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 이상이었을 것이다.


도윤은 책을 조심히 다시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를 꺼내 짧게 적었다.


“다음 주에도 이 자리에 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메모지를 책 안에 끼운 후, 천천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커피 머신이 다시 작동하는 소리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삶이라는 것도… 결국엔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수용소 같은 거니까.’


그리고, 마음속 메모장 한 구석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 5시 20분, 같은 시간의 남자. 세상이 안 불러주는 이름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이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다시 여느 때처럼 아무 말없이 커피를 마시러 왔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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