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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꽃 피는 계절이 온다 • 은행나무

계절 따라 꽃멍 숲멍(가을) | 은행나무 | 원주 반계리 & 양평 용문사

by 새벽강

재발행하는 글입니다.

브런치북 지정을 하지 못한 채 발행한 글을

해당 브런치북으로 옮길 방법이 없어 부득이 재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읽으신 분께는 양해 말씀 드립니다.


나의 가을 위시리스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서재에서 책을 꺼내 펼치는데 무언가 떨어졌다. 바닥에 보니 노란 은행잎 모양 책갈피다.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시사회에 갔다가 염정아 배우에게 받아온 작은 책갈피 하나가 옛날 기억을 불러온다.


오래전 학생들은 가을이면 진짜 은행잎이나 단풍잎으로 책갈피를 종종 만들곤 했다. 먼저 깨끗한 잎들을 주워 두꺼운 책 사이에 넣어 둔다. 시간이 지나 모양이 잡힌 후에 코팅을 하면 책갈피가 완성된다. 간혹 코팅하기 마른 잎 위에 좋은 글귀를 직접 손 글씨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책갈피는 책이나 편지에 넣어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 무렵 국어 교과서 속표지에는 특별한 은행나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주 큰 은행나무 아래 스님 한 분이 비질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스님이 아주 작게 나온 모습은 그 나무가 거대함을 알려주었다. 아마도 절에 있는 은행나무인 모양이다. 어디일까? 세월이 한참 흘러 그 나무가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려 수령이 1000년도 훌쩍 넘어 고려시대에 심어진 나무라고 한다. 38m에 달할 정도로 크다. 아직 용문사에 가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의 가을 위시리스트에는 용문사 은행나무 방문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가 멸망하여 고려에 항복하자,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비통함과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 나무 수령과는 시대가 맞지 않지만, 나무의 역사성과 신성함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키가 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사진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사이트)


최고령 타이틀리스트의 경이로움,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천년 세월도 훌쩍 넘은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작년 11월 어느 날 원주로 가을 나들이를 떠났다. 소금산을 둘러보고 서둘러 반계리로 향했다. 소금산 출렁다리도 참 좋았지만 원주에 왔으니 반계리 은행나무를 꼭 만나고 싶었다. 반계리에서 은행나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온 이들의 뒤만 따르면 되었다. 마침내 은행나무 앞에 도착했다. 가지에도 황금빛 잎들이 남아 있었지만, 더 많은 황금은 바닥에 쫙 깔려 있다. 마치 노란 융단을 넓게 펼쳐 놓은 듯했다.


이 노란색의 비밀은 뭘까? 단풍은 나무들의 월동 준비 과정이다. 겨울철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잎을 떨어뜨리는 과정이다. 단풍나무 등이 붉게 물드는 것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합성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이 안토시아닌 합성이 미미하여 원래 잎 속에 숨어 있던 노란색 색소(카로티노이드)를 드러낸다. 이런 과학적 설명을 찾아보았어도 샛노란 잎은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2024년 국립산림과학원이 전문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측정한 결과,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수령은 무려 1317년으로 밝혀졌다. 기존 국내 최고수령으로 알려진 용문사 은행나무보다 2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밝혀져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 공식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둥근 타원 모양의 균형 잡힌 수형이 아름다워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올해부터는 최고령 은행나무를 만나러 반계리에 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과 기상, 도동서원 은행나무

서원의 기상과 품격을 보여주는 도동서원 은행나무

달성군 현풍은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 지역 학교에서는 '문화유산길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날씨가 좋은 가을 주말에 희망 학생들이 도보로 지역의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해에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도동서원이 방문지였다.


도동서원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한훤당 김굉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쌍계서원, 보로동서원이라는 이름을 거쳐 사액을 받아 도동서원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한국의 서원' 아홉 곳에 포함된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휘감고 돌아가는 언덕을 뒤로하고 의연하게 서있다.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중정당을 비롯한 건물과 담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이 서원을 더 빛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입구의 은행나무이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는 여러 서원에 심어졌다. 그중에서도 도동서원 은행나무 모습이 특히 장관이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옆으로 여러 가지를 한껏 뻗어 우람하고 위엄 있다. 마치 굳건한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풍천과 낙동강을 따라 약 9Km를 걸어서 도착했을 때 환하게 맞아주는 은행나무에 많은 학생들이 감탄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선비 정신을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일러주는 듯하다.

도동서원 은행나무 아래에서 학생들


누구에게나 꽃피는 계절이 온다

직전 근무한 학교 울타리 주위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가로수길은 산책로로 인기가 많았다. 봄철 어느 날 은행나무 아래를 걷는데 연두색의 자잘한 무언가가 많이 떨어져 있다. 그 모습이 작은 청포도 송이 같기도 하고, 복분자 열매 같기도 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아직 나무에도 많이 달려 있다. 검색을 해 보니 은행나무 수꽃이다. 은행 열매가 열리는 암꽃은 수꽃과는 또 다른 모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은행나무는 노란 은행잎의 이미지가 항상 먼저 떠오른다. 은행나무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은행 열매가 열리니 당연히 꽃도 있었을 텐데, 왜 여태 몰랐을까. 봄철 은행나무꽃을 보면서 돌아보게 된다.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하거나, 그 이미지로 편협하게 대상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각각의 사물마다, 사람마다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모습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좀 더 찬찬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겠다.

올 가을에는 용문사 은행나무 노란 세상을 만나러 가고, 내년 봄에는 은행나무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야겠다. 누구에게나 꽃피는 계절은 찾아올 터이니….






은행나무꽃 / 김남극


밭가 은행나무 아래

새벽에 나가보니

눈물 같은 꽃 떨어져 있다

은행나무꽃 본 이 없다

밤에 꽃 피었다가

밤에 꽃 진다

누가 오지의 슬픔을 알랴

자정 넘어 혼자 울다

혼자 잠드니

-김남극,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문학동네, 2008)



은행나무 꽃말: 장엄, 장수, 정숙

◈전국 은행나무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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