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하면 떠오르는 노래!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이 오면,
학교마다 운동회 준비로 분주하다.
코로나로 한동안 없어졌던 운동회를 다시 개최했을 때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함께 감격했었다.
라떼(나 초등때)만 해도, 10월 초 가을 운동회를 위해
9월 뙤약볕에서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부채춤과
무슨 글자인지도 알지 못하는 마스게임 연습에
정작 운동회 날 모두들 새까맣게 그을은 얼굴로
운동회를 치르곤 했다.
지금은 자료가 워낙 많아
경기 방법이나 대형설명이 영상 한 번으로 해결되지만,
그 땐, 도대체 우리가 배우는 무용이 어떤 그림인지
대형 속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보일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온 동네 사람들 축제의 장이었던 운동회는
설레는 날이었다.
평소에 못해봤던 줄다리기, 공굴리기, 박 터트리기, 차전놀이 같은 스포츠(?)도 경험하고
다른 학년들이 준비한 무용도
볼거리가 없었던 당시엔 큰 구경거리였다.
김밥, 간식등을 준비하여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경기가 끝나길 기다리던 부모님과
함께 맛난 음식을 먹노라면
별 것 없는 일상에 큰 소풍이요, 이벤트였다.
발령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학년을 가르쳤을 때,
그 해 가을 운동회에서 꼭두각시를 가르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그 때가 2005년 정도였으니,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영상자료가 흔하지 않을 때였다.
꼭두각시 안무를 일일이 도안으로 그리고,
거울을 보며 연습한 후,
반별 무용 대표를 뽑아 연습시키고,
대표 아이들과 함께 구령대에 올라가
100명의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동작 하나하나를
가르쳐야했다.
그랬기에 당시 학년 업무 분장에서 무용은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언제 그랬냐싶게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같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요즘엔 모두가 즐기는 운동회가 되어
무용은 생략하고, 운동회 전문 행사 업체에 맡긴다.
줄서는 연습조차 하지 않아도
만국기부터 학년별 다양하고 재미있는 경기와
전문 MC의 현란한 말솜씨, 레크레이션 시간, 계주까지
돈만 지불하면 교사 포함 모두가 즐거운 운동회가 되었으니 참 좋아진 세상이다.(이러고 보니 내가 연식이 많이 된 것 같다)
운동회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음악은 운동회의 뜨거운 열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구경만 해도 흥이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청군, 백군 나누어 펼치는 응원전에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와야 제 맛이다.
운동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노래를 꼽으라면
단연코 <질풍가도>일 것이다.
이 노래는 제목에서 눈치챘듯
초반 도입부 부터 아주 질풍같이 훅 들어온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유정석의 <질풍가도> 무려 2006년 곡.
이 노래로 6학년 아이들과 단체 무용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동안 함께 연습했던 5개반 아이들이
두 줄씩 운동장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다.
구령대에 올라 오와 열을 맞춘 아이들을 바라보며
손신호와 구호를 보낸다.
노래 시작과 동시에 술을 든 아이들이
박자에 맞춰 양 팔을 위로 들었다 내렸다 한다.
100명 이상의 아이들이
줄을 바꾸어가며 팔과 다리 동작을 딱딱 맞추면
왠지 모를 희열과 뿌듯함을 선사한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찾아 연신 사진을 찍기 바쁘다.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 해줄 우정을 믿고 있어
가사도 딱이다.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롭지만, 우리 함께 가자는 희망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치어리딩의 마지막 부분이 하이라이트다.
반복되는 뒷부분 후렴구에서
앞줄부터 풍차 돌리기 파도타기가 이어진다.
맨 뒷줄까지 간 후 이번엔 왼쪽부터 오른쪽,
오른쪽부터 왼쪽
100명이기에 자아내는 책임과 협력의 퍼포먼스는
보는 이들에게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산 모양을 만들며 수술을 흔드는 엔딩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구령대를 내려와
아이들과 함께 원래 앉는 자리로 돌아올 때면
'우리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한 마음으로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 아이들은 글로만 배운 공동체 의식을 몸으로 체득하는 중이다.
응원석에서는 반별 개그맨 총 출동이다.
평소 끼를 뽑내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참아왔던 온갖 끼를 폭발시킨다.
응원가 중 트와이스의 <CHEER UP>이 기억난다.
당시 이 노래가 메가히트를 기록했을 때였다.
이 노래가 나오자 벌떡 일어난 우리 반 남학생 승준이(가명)는
걸그룹 춤을 어찌나 잘 추는지
모두가 깜짝 놀라 넋을 읽고 바라봤다.
CHEER UP BABY
CHEER UP BABY
좀 더 힘을 내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돼
그래야 니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
태연하게 연기할래 아무렇지 않게
내가 널 좋아하는 맘 모르게
just get it together
and then baby CHEER UP
중독성 있는 후렴구와 안무에서는
모두가 떼창으로 자기 팀이 아닌
춤추는 단장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CHEER UP>노래는 특히 트와이스 팬이었던
내 둘째 아들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린다.
지금은 체육교육과에 진학할 정도로 훌쩍 커서 상남자인 둘째는 당시만 해도 영 키가 자라지 않아
항상 키번호 1,2번을 다투곤 했다.
그에 비해 몸은 가벼워 이 노래만 나오면
춤을 어찌나 잘 추던지,
아이돌을 시켜야 하나 잠시 고민할 정도였다.
키는 작지만 운동신경이 원체 좋았던 둘째는
늘 계주 선수에 뽑혔다.
짧은 다리지만 몹시 빠른 아이였다.
그런데 그만, 6학년 가을 운동회 계주에서는
다리가 긴 상대 선수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지금이야 가족돌봄휴가라는 게 있어
몇 시간이라도 아이 학교 행사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생겼지만
당시엔 그런 제도가 없어 아이 운동회에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아빠가 시간을 내어 운동회를 볼 수 있었다.
계주에서 진 아이는 몹시도 분해하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는 친구를 떠올리고
자신의 짧은 다리를 원망했다.
운동회 업체는 아이들을 흥분시키게도 잘 하고,
점수 조정을 하며
승부에 열 올리는 아이들 마음도 잘 다독인다.
계주로 학교 운동장이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을 때,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오는 노래에
장내의 소란은 정리되고,
자연스레 마무리 체조로 넘어간다.
반복되는 하루에 시작이 되는 이 노래
네 옆에서 불러주겠어 힘내야지 뭐 어쩌겠어
파이팅 해야지 파이팅 해야지
Don't give it up Never give it up yeah
파이팅 해야지 파이팅 해야지
우린 부석순 Ah 파이팅 해야지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
졌지만, 잘 싸웠어.
힘내!
넌 멋졌어!
파이팅 해!
오늘의 열정만큼 아이들은 한 뼘 더 성장한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혼자가 아니라고 응원해준다.
팀웍을 다지고, 함께 협력하며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고
졌다고 깔보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게 행복하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