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무턱대고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무려 1971년에 발표된 <가을편지>_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 최양숙 노래
이후 <향수>를 부른 이동원이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했다.
가수 얼굴은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숱하게 들은 노래.
아마도 첫 가사가 한몫한 듯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가을엔 왠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고,
마음을 전하고 싶고,
끄적이고 싶고
갑자기 시상도 떠오르고 그런 법이니까.
책 읽고, 글쓰기 좋은 가을이 오면,
아이들과 시 프로젝트를 한다.
국어교과서 시 단원을 따로 떼어 8차시 정도
시에 대해 공부하고,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고,
자신만의 시를 지어 발표하는 수업.
그 첫 번째 시간!
매주 1시간 있는 학교 도서관 수업을 활용하여
아이들이 각자 시집을 고르고 읽는다.
그 후, 마음에 드는 시를 5편 정도 골라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중 하나를 베껴 쓰고,
고른 이유와 함께 시를 낭송하는 발표 수업.
도서관에는 동시집부터, 유명한 옛 시인들의 시집, 현대시집까지 다양한 시집이 꽂혀있다.
도서관 작은 무대에 한 명씩 올라가 시를 낭송한다.
우리 반 감성 소녀가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를 읽기 시작했다.
"제가 이 시를 고른 이유는 그리운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좋아요.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작고 예쁜 꽃이 있잖아요.
미처 모르고 지나쳤는데, 자세히 보면 보이는 꽃이 웃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저도 전학오기 전, 꽃처럼 다정한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한테 이 말을 해 주면 좋겠어요.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라고요.
꼭 이맘때가 되면, 감기랑 독감환자가 많잖아요.
우리 다 아프지 않았으면 해요."
모두의 안녕을 바라는 감성 소녀의 마음이 참 곱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가을이랑 아프지 마라가 그런 연관성이 있었구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작은 것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해 주고 있었네."
"우리도 시를 써 보자.
모든 노래는 원래 다 시였어.
시에 노래를 붙인 곡도 많고,
시의 특징이 반복, 리듬감, 운율인데,
노래 가사도 그렇잖아.
또 아니? 너희들의 시가 노래가 될지?"
그냥 시를 쓰는 것보다
다양한 시를 읽고, 필사하고, 친구들과 낭송하고
서로의 감상평을 나눈 뒤에
쓰는 시는 확실히 다르다.
아이들의 시에는 순수한 동심과 진솔함,
삶에서 끌어올린 싱싱한 글감과 감성이 배어있다.
그 감성이 좋아, 일부러 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선생님, 쓸 게 없어요. 뭘로 써요?"
무작정 시를 쓰라고 하면, 아이들은 시를 무척 어려워한다.
안 그래도 글쓰기가 싫은데,
시 특성상 축약된 문장 속에 하고 싶은 말을 구겨 넣는 게 힘든가 보다.
"너희들 일상 속에서 겪은 일을 써 봐.
어렵다면, 구체적인 사물을 떠올려도 좋고, '친구'나 '나'를 주제로 써도 좋아.
학원, 엄마, 학교, 너희들이 좋아하는 물건? 뭐든 괜찮아."
이랬더니, 우리 반 목소리 대장 성균이가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빠르게 시 한 편을 지어내, 바로 발표하겠단다.
제목 : 소주
김성균(가명)
무엇이 그리 좋길래
맨날 맨날 우리 아빠 퇴근을 막네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맨날 맨날 우리 아빠 취해서 오네
무슨 마법의 약인가?
아빠를 행복하게 하는 너,
무슨 맛일까?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
소주야. 우리 아빠 그만 취하게
그만 맛있어져라
반 친구들이 빵 터졌다.
어떤 아이는 우리 아빠랑 똑같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그래도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한 마디씩 한다.
아이들의 시엔 삶이 들어 있다.
우리 반 문학소녀 은영이는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다.
제목 : 내 친구의 마음속 정원
-이은영(가명)-
내 친구는 마음속에
웃음꽃을 기른다.
항상 나한테
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내 친구는 마음속에
공감나무 기른다
내가 속상하면 괜찮아?
위로해 주고
내가 기쁘면
같이 기뻐해준다
내 마음속 정원에는
무슨 식물이 있을까?
우리 애들 수준이 이 정도라고, 훗!
내가 쓴 것도 아닌데, 어깨가 으쓱해진다.
시 수업을 하니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아이유의 <Love poem> 2019년에 발매된 미니앨범 수록곡
https://youtu.be/L0M68w3n1MU?si=k8iVYMoXNuE5GZSH
이 노래를 작사한 아이유의 곡 설명이 감동이다.
“인간의 이타성이란 그것마저도 이기적인 토대 위에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이 홀로 고립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괴로워
재촉하듯 건넸던 응원과 위로의 말들을,
........ 중간 생략
누군가의 인생을 평생 업고 갈 수 있는 타인은 없다.
하지만 방향이 맞으면 얼마든 함께 걸을 수는 있다.
또 배운 게 도둑질이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다.
내가 음악을 하면서 세상에게 받았던 많은 시들처럼
나도 진심 어린 시들을 부지런히 쓸 것이다.
그렇게 차례대로 서로의 시를 들어주면서, 크고 작은 숨을 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 앨범 곡 소개 중 -
노래는 잔잔히 읊조리듯 시작하여
뒤로 갈수록 하늘에 울부짖는 기도가 된다.
I'll be there 홀로 걷는 너의 뒤에
Singing till the end 그치지 않을 이 노래
아주 잠시만 귀 기울여 봐
유난히 긴 밤을 걷는 널 위해 부를게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부를게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힘든 시간을 보내다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에 대한
추모곡 같기도 하고,
여전히 어딘가에 조용히 숨죽이며 힘든 시간을 버티는 이들에게 보내는 기도 같기도 하다.
노래 한 곡이 주는 위로가 참 크다.
좋은 시와 노래는 어딘가로 날아가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때론 새 힘을 불어넣는 커다란 힘이 있다.
"우리 반 모두 발표했는데, 선생님 쓴 시도 읽어주세요!"
녀석들, 이럴 땐 꼭 나를 끼우려 한다.
선생님도 우리 반 구성원이라며.
그래 나도, 가을이니까
시 한 편 투척!
가을이 나에게로 왔다
- 오삼남 -
바쁘다고
쳐다도 안 보고
신경을 안 썼더니
가을이 성큼성큼 걸어
나에게로 왔다
눈부신 햇살과
파아란 하늘로
몸 단장을 하고
노오란 은행잎 새빨간 단풍잎
악세사리들
요란도 하다.
하도 안 봐주니까
주홍빛 갈색 잎을
눈앞에 툭, 떨어뜨린다
내가 왔어~
이래도 안 볼래?
한 잎, 두 잎
수북이 쌓인
가을의 편지
한 장 한 장 읽으니
눈물 난다
올해도 수고했다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내년에 올 때까지 잘 버티라고..
가을이 건네는
사랑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