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득실득실 -
초딩 자녀가 있는 분은 아실 듯. 맥락 없는 헛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은 물론 과감하게 동참해 일종의 만담 비슷한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가 있다. 동참의 정도는 자녀와의 친밀도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스스로를 망가뜨리거나 연출하면서까지 일종의 연극 놀이를 할 때도 생긴다. 어이구 그럼 왜 얼굴에 까막까막한 기미가 그렇게 득실득실하냐. 얼마 전 그 초딩 녀석과 (참을성을 갖고) 맥락 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열세에 놓인 녀석이 갑자기 꺼낸 말이었다. 순간 나만 뮤트를 눌러둔 듯 0.5초간 멍해져 버렸다. 젠장. 평소 불시에 맥락 없는 대화가 시작될 때면 그때그때 개인적 상황에 따라 (자녀의 창의성 함양을 위해 친절히) 받아주거나, (유머러스한 엄마가 돼 보려고) 받아치거나, (시간적, 체력적 여력이 없을 시) 제압해 버리거나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어느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어택이었나. 0.5초의 정적은 무엇이었나. 조금 뒤에야 감지되었다. 마음이 씁쓸+쓸쓸해져 버리는 기분. 괘씸함과 서운함이 절반씩의 농도로 섞였다고나 할까. 녀석은 당연히 제 눈에 보이는(더욱 서글프다)대로 말한 것뿐이니 의도나 의미가 없음은 명확히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역시 중년 여성에게 기미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 20대 여성의 체중이나 50대 남성의 머리숱에나 비견될까. 부정할 수 없이 중년 대열에 들어선 여성으로서 기미가 보이다 못해 득실득실하다는 말이 아프게 꽂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딸에게서. 얘는 (흑) 내가 저를 어렵게 낳고 수술 자리 켈로이드 때문에(흑) 얼마나 힘들었는데 호르몬 때문에 하얗던 피부가 갑자기 변해 얼마나 속상했는데…. 머릿속 말풍선에 수많은 말들이 생기고 사라졌다. 그래, 관두자. 아직 한 자릿수 나이에 불과한 네가 기미와 호르몬과 출산 직후의 변화와 피부톤과 레이저치료에 대해 무엇을 알겠니. 알아서 뭐 하겠니. 그래, 알면 안 되지. 순간 어택에 순간 종결. 결론은 낫지만 사람의 기분이란 얼마간은 남아 근처를 맴돈다. 보낼 만큼 제 시간을 보내고서야만 사라진다. 젠장. 감정의 농도는 더 명확해져 갔다. 씁쓸+쓸쓸에 억울도 섞여 있었다. 그것은 곧 서글픔과 비슷한 감정이었는데 뭐가 서글픈걸까. 너를 만난 것도, 낳아 기르는 것도, 분명 내 의지, 소망인데. 뭐가 서글플…. 필요 없는 생각이 의미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다 (다행히) 막혔다. 아무 말도 이어 붙이지 않은 것도 잘한 것. 진정 쿨한 엄마는 특정 어택에 자극받거나 깊게 들어가지 않는 법.
그래. 기미 같은 것쯤 박박 지워버리자. 레이저로. 역시 피부는 피부과에서 상담해야 한다. 기미 척결은 병원에서! 적어도 ‘득실득실’만이라도 떼어내 보자. 진피 아래 깊게 똬리를 틀고 있을 멜라닌들 싹 다 부숴버리자. 그래서 저 서글픔 비슷한 감정이 내면에 똬리를 틀어 언젠가 길어 올릴지 모르는 말 따위 만들지도 말자. 전국의 K딸들이 엄마가 되어 자신의 엄마들과 똑같이 반복하는 말. 꼭 너 같은 딸 낳아 키워봐라 같은 구구절절한 소리가 줄줄이 딸려 나와 건강하던 관계를 뒤덮어 버리고 나 자신을 추하게 만들지 않도록 부수자. 싹 부숴버리자. 자동차 점검이나 구충제 복용처럼 멜라닌 색소 분쇄 주기가 찾아온 것뿐이다. 가자. 피부과로. 감정도 피부도 무채색 득실득실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자.
올해가 가기 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