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량

by 임경주


도박으로 큰돈을 잃었다.

쌓인 빚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송사장이 솔깃한 제안을 한다.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 반대편 길을 막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이왕이면 차가 고장 난 것처럼? 보험사 직원이랑 전화하는 척하면서 진입차량들을 돌려보내는 거지.

빵꾸요?

그래, 빵꾸. 빵꾸 좋다. 빵꾸로 가자.

송사장의 계획은 박영감의 차량을 다리 양쪽 길목에서 막은 뒤, 현금을 강탈하자는 것이었다. 박영감이 도박장에 등장한 건 최근 6개월 전이다.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올 때마다 돈을 싹쓸이 해갔다.

우리 가게 돈 20억 현금을 트렁크에 쌓고 다니는 영감이야. 이 영감탱이 곧 뜰 건 뻔하고. 어차피 얻어터져도 신고 못해. 자네 몫은 2억. 와, 이정도면 손도 안 대고 코푸는 거다. 어때?

좀만 더 주시죠.

송사장의 말대로 하자면 20억에는 내 돈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너 아니어도 할 놈 많다.

2천만 더요.

송사장에게 2억 2천을 빚졌다. 길만 막아주면 빚이 전액 탕감되는 것이다.

그래, 알았어. 받아.

송사장이 돈뭉치를 던져준다.

착수금? 아니, 그냥 보너스라고 하자.

감사합니다.

집으로 가. 그 돈으로 또 노름할 생각하지 말고.

네.

개 새끼. 등 떠밀고 있으면서 딴소리하고 있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도박판에서는 옆에 딱 달라붙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던 년이 연락도 없고, 받지도 않네. 개털이라 이거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이 산행으로 이어졌다. 나 같은 놈 차라리 죽자, 살아 뭐해 하면서도 막상 죽을 용기도 없다. 간사한 놈. 머리가 복잡했다. 이제는 하다못해 노상강도라니. 마지막 배팅이 떠오른다. 티파니를 옆에 끼고 술만 취하면 겁 대가리를 상실한다. 후회가 밀려오면 또 다시 죽고 싶어지는 게 정말 미칠 것만 같다.

비가 제법 내리네. 우비를 입고 가벼운 산책을 생각했는데, 억지로 오르다보니 체력이 고갈되었다. 신발까지 질퍽거린다. 오르면 오를수록, 천근만근인 다리를 들어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게 고통 그 자체다. 정신적인 고통에 육체적 고통까지 쌓이니 정말 죽을 맛이다. 산다는 거… 왜 이렇게 힘든 거냐? 전화기가 울린다. 송사장이겠지 했는데 부고문자다.

어쩌라고? 고향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었다. 언제였더라. 돈이 너무 급해서 연락을 했었다. 전화를 받지도 않는 놈이었다. 삭제. 너무 힘들다. 피곤하고 졸리다. 어디든 누워서 자고 싶다. 내 옆으로 누렁이가 지나간다. 유기견인가보다. 비에 쫄딱 젖었다. 누렁이를 경찰이 뒤 쫒아간다. 경찰? 경찰이 몽둥이를 들고 있다. 뭐냐? 나도 따라간다. 계곡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나타났다. 이름이 출렁다리란다. 내 속도 울렁거린다. 건너가고 싶지가 않았다. 충동적으로 뛰어 내릴 수도 있으니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한두 번 당했나? 하지만 깽! 소리가 들려오니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나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해발 몇 미터일까? 다리 중앙에서 멈춰 섰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의 속도만큼 어느새 불어난 흙탕물이 바위에 부서지며 거세게 흐른다. 휘청, 하며 현기증이 일어나 주저앉았다. 겁에 질려 난간을 꽉 붙잡았다. 출렁다리와 내가 한 몸처럼 느껴졌다. 뛰어내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거…. 또는 죽었다는 거,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출렁다리 끝에 도착하자 거대한 은행나무가 나타났다. 비가 멈췄고, 먹구름이 사라졌다. 태양이 등장한 순간, 노란단풍잎이 황금처럼 빛났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시야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나무였다. 누군가가 1500년을 살아왔다고 속삭인다. 웅장했다. 보는 순간, 나는 압도당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용서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소원이 빌어졌다. 다시는 노름에 손대지 않게 해주세요. 한참을 서서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사진으로 남겨두자. 찰칵. 순간,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아까 그 누렁이가 사진 속에 있다. 은행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다.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기 일보직전이었다.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깊게 패인 계곡이 있었고, 그곳에는 유혹의 흙탕물이 흘렀다. 그 흙탕물에 몸을 맡긴 채로 살아왔다. 출렁다리처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었지만, 난 이 다리를 단 한 번도 건너지 않았다.

친구 어머니의 부고소식에 고향을 찾아 간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졸업도 하지 못했었다. 아버지 사업을 위해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났다. 아니, 거짓말이다.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저지른 사기로 인해 아버지는 교도소로 갔고 어머니와 나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 뒤로 처음 찾아 가는 길이다. 족히 20년은 넘었을 것이다. 길이 새로 났다. 거짓말처럼 몰라보게 변했다. 내비게이션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실수는 하겠지. 난 그저 기계를 믿고 안내에 따라 저속주행을 한다. 어린 시절 나와 우리 친구들의 놀이터였던 석조교량이 우측에 보였다.

저 교량아래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우고 개구리, 뱀, 미꾸라지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가끔 동네 아저씨들이 키우던 누렁이를 끌고 와 은행나무에 목을 매달고는 몽둥이로 때리면 새파란 은행잎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렸다. 우리는 한참을 불 옆에서 구경했다. 나는 애써 새파란 은행잎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아저씨들 누렁이 태운다고 우리 불 또 빼앗아 가게 생겼네. 근데, 꼭 저렇게 패야 하나? 숨도 못 쉬는 데?

응. 저래야 고기가 맛있대.

얻어맞고 다 죽은 것으로 보였던 누렁이가 불 옆에서 살아나 도망칠 때도 있었다.

저 개새끼 잡아!

아저씨들도 뛰고 우리도 뛰었다. 지나가던 경찰차에서 경찰이 내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누렁이를 붙잡았다.

이놈이 덜 맞았구나. 더 맞자.

경찰이 누렁이를 끌고 와 은행나무에 다시 목을 매달고는 몽둥이로 때렸다.

박순경이 최고야.

동네아저씨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 때 나를 노려보던 박순경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철사에 꿰인 개구리다리와 미꾸라지가 구워질 때의 냄새는 좋았지만 누렁이 털 타는 냄새는 역겨웠다. 그럴 때면 교량 위로 올라서서 윗마을을 향해 무작정 걸었었다. 단지 냄새가 역겨워서 피하기 위해 그랬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아내는 파리 한 마리도 잡아 죽이지 못했다.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을 생명을 생각하니 어떤 생명이든 함부로 죽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석조교량은 하천 위로 윗마을과 우리 마을인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독특하게도 이름이 두개였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초량이라 불렀고 윗마을 사람들은 금량이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석조교량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아주 오래전, 윗마을 사람들은 신선이었고 아랫마을 사람들은 짐승처럼 산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핸들을 꺾었다. 방향을 틀어 초량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졸음이 또 밀려온다. 참을 수가 없다. 겨우 눈을 떴는데, 입구를 막고 있는 빨간색 폐쇄 간판이 눈에 띄었다. 출입을 통제합니다. 위험했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환청이다. 조수석의 아내가 다칠 뻔했다.

아, 무슨 운전을 이렇게 해?

미안, 미안.

아내에게 혼나며 내려서보니 차량통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나 여기가 왜 이렇게 낯설지? 어디에서 본 것 같아.

아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교량 끝이 보인다. 그 사이로 사람은 이동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여기서 사람 죽었음. 여자가 죽었음.

화살표를 따라 이어지는 낙서.

이거 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아이들의 낙서를 보니 그 날의 사고 장면이 떠올랐다. 아내가 묻는다.

와, 여기서 진짜 사람이 죽었어?

응. 여자.

그럼 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낙서는 뭐야?

직접 보지 않은 녀석들이 하는 말이겠지.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자가 있고, 거짓말을 사실로 믿고 그대로 전하는 자가 있다. 또 그 거짓말이 사실과는 전혀 다른 거짓이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퍼트리는 자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는 놈이 있다. 난 사고를 직접 목격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보았다. 밤하늘을 찢으며 울려 퍼지던, 브레이크 쇳소리는 여자의 비명소리 같았다.

그 때는 나무전봇대를 시멘트 전봇대로 교체하던 시기였다. 교량 옆에 교체되고 방치된 나무전봇대를 누군가가 옮겨 길을 차단한 것이다. 새카만 기름이 번질번질한 나무전봇대에 부딪친 오토바이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떨어졌다. 그것을 증명하듯 붕 떠오른 헤드라이트 불빛은 밤하늘에서 지불놀이처럼 원을 그리더니 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정월대보름 전야였다. 교량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지불놀이를 즐기고 있던 나와 친구들 앞에 윗마을 형들이 나타났다. 윗마을 신선은커녕 깡패나 다름없었다. 불을 빼앗겼다. 우리는 좀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모닥불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 형들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온다! 하며 교량 위로 이동했다. 포복자세로 엎드리더니,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들처럼 숨을 죽였다.

오토바이 한 대가 질주해 오다가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막고 있는 전봇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충돌소리만으로도 이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고가 난 순간 우리는 불을 내팽개쳤다. 본능적으로 교량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고다, 사고! 그 때는 철이 없었다. 단지 또 하나의 볼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신이 났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서보니 처참했다. 무서웠다. 도로 위에 굉장히 많은 양의 피가 보였다. 새카만 기름 같았다. 달빛에 비친 피의 색은 저렇구나! 지금도 선명하다. 오토바이 앞바퀴가 빠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핸들이 엿가락처럼 휜 채로 압착되었다. 운전자는 심하게 다쳤고, 뒤에 탔던 여자는 즉사했다.

고인의 사진을 보며 술잔을 올렸다. 솔직히 친구 어머니라지만, 저 아줌마 그 때 당시 꽤 맘에 들지 않았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친구어머니는 양평댁으로 불렸다. 평소에도 초량을 넘어 윗마을을 자주 놀러갔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잘 어울리던 거울가게 주인아저씨인 허씨를 싸잡아 욕하고 흉보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손도손 모여 채소를 다듬으며 어울리는 장소는 우리 친구들이 교량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아주머니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구슬치기를 했다.

그 미친놈!

구슬치기에 정신이 없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세상에! 자기 처제 결혼식 하는데, 술이 떡이 되어가지고선 낫을 휘두르는 그런 미친놈이 어디 있어? 처제 결혼식을 그렇게 망치는 놈이 어디에 있냐고!

다른 아주머니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처제를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아휴, 그러면 안 되지. 그 미친 놈 지금 언니동생을 둘 다 옆구리에 끼고 살고 있어요. 이게 말이 돼? 나 참, 기가 막혀! 이놈은 그냥 사람새끼가 아니야. 짐승만도 못하지. 아니? 짐승도 이러지 않아. 이런 미친놈은 날벼락 맞아 죽어야해!

우리는 그 날 허씨 아저씨는 완전 미친 사람이구나! 그렇게 믿어버렸다.

썩을 년. 죄 짓고 경찰서나 들락거리는 주제에 터진 주둥이라고 놀려대기는. 얘들 있는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쉿.

양평댁이 자리를 떠났을 때였다. 쉿, 하며 아주머니들이 날 보더니 눈을 피했다. 나를 노려보던 박순경의 눈빛이나, 내 눈치를 살피는 아주머니들의 눈빛이나 모두 다 아버지 때문이란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 아저씨 말이야. 하루는 처제 방에서 자고, 다음 날은 자기 진짜 부인이랑 자고 그러는 거야? 우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니지. 셋이 같이 잘 수도 있겠지.

에이, 설마? 그건 진짜 아니다.

니가 봤어? 안보고 어떻게 알아?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전부 다 진실일까? 만약 아니라면, 허씨 아저씨를 둘러싼 소문 중에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우리의 불을 빼앗은 형들. 그 중 한 명이 거울가게주인 허씨의 아들 허영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량 아래에서 놀던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사건이 다시 또 도마 위로 올라왔다.

어쨌든 영참 형이 주범인 건 맞잖아?

내 말에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닫는다.

지금 뭐하고 살아? 그 인간.

몰라. 어디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서울에서 유명한 건달이라는 말도 있고.

건달? 건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렇게 유명하면 내가 알겠지.

내가 왼팔을 걷어 용 문신을 보여주자 친구들이 귀엽다며 웃는다.

이게 귀엽냐? 살벌하지.

살벌하긴, 귀엽기만 하다. 근데 그런 쓰잘 데기 없는 걸 도대체 몸에 왜 하고 다니는 거야?

너희들이 뭘 알겠냐.

나는 오른팔소매도 걷어 올렸다.

으이그.

아내가 손바닥으로 등짝을 후려치더니 내 양쪽 소매를 잡아내려 문신을 가린다. 갑자기 윗마을 거울가게 주인, 허씨 아저씨가 궁금해졌다.

그 거울 가게 아직도 있어? 장사를 해?

응, 장사 해. 근데, 그 아저씨 좀 이상해. 치매 같아.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아내와 함께 폐쇄된 교량을 넘어 윗마을 거울가게에 도착했다. 거울의 방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거울들이 나와 아내를 비추었다. 아내가 깔깔깔 거리며 웃는다. 어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똑같이 비추었지만, 어떤 거울은 우리를 난쟁이로 만들었다. 어떤 게 진짜일까? 난쟁이의 내 모습을 다른 거울들이 연쇄적으로 비춘다. 거짓말을 사실로 알고 전하는 사람처럼 난쟁이의 내 모습을 격자간격으로 계속해서 비춘다. 그 거울 안에 내가 있고, 또 다른 내가 또 있다. 어떤 거울은 난쟁이의 나를 거인으로 만들었다. 내 옆으로 거울가게 주인 허씨가 다가왔다.

나처럼 정신 못 차리는 노름 쟁이. 만취상태로 낫을 들고 휘둘러 처제 결혼식을 망쳤고, 그 처제를 다른 어떤 남자에게조차도 가지 못하게 옆에 데리고 사는 남자. 미친놈. 많이도 늙었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당신 아들 허영참이 아무런 죄도 없는 한 여자를 죽게 만들었어요.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내 나이 어느새 서른 여섯이다. 직업? 건달이 직업이라면 건달이다. 그 때 그 어린 시절에는 이 아저씨도 무섭고, 이 아저씨의 아들도 무서웠지만 지금은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난 옆에 서 있는 허씨에게 물었다. 거울 속에 비친 허씨의 모습은 나처럼 난쟁이였다.

어르신, 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글쎄다.

저 다리 건너 아랫동네에 태어나 살았었는데…. 중학교 때 집안 사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고향을 좀 일찍 떠났죠.

설명을 너무 길게 했나? 내가 다 졸리다. 저기 저 접대용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싶다. 허씨가 나를 본다. 알아본다.

김씨 아들이네?

노인네 눈빛 좀 보소. 박순경의 눈빛, 양평댁의 눈빛과 똑같다.

김씨 아들이네? 야! 너 이리 와봐. 너 니 아부지 어디 있는지 알지?

갑자기 박순경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축 늘어져 있는 누렁이의 모습도 보인다.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걸까? 건물이 흔들리고 거울이 흔들린다. 거울 속의 나도 흔들린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걸 허씨가 붙잡아 세워 준다. 진동이 멈췄다. 가게 문이 열렸다. 경찰, 박순경이 들어왔다. 몽둥이를 들고 있는 젊은 모습 그대로다. 휘잉, 찬바람과 함께 낙엽도 따라 들어왔다. 노란색 단풍이 든 은행 나뭇잎이었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인지, 거울을 통해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도 모르겠다.

휘잉, 휘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내 눈앞에 15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가 황금빛 이파리를 흔들며 노래를 한다. 속삭인다. 지나간 과거의 선조들,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각자의 사연을 속삭이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슨 이야기일까? 귀를 기울이자 박순경도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귀를 기울인다. 순간, 거울 속 은행나무가 작아졌다. 잎이 새파랗게 변했다. 털이 타들어 가는 역겨운 냄새도 난다. 동네 아저씨들이 누렁이를 먹으며 아버지에 대해 소곤거린다. 무슨 말일까? 허씨가 옆에서 말한다.

자넬 보니까,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오르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박순경과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 나까지 죄인 취급하던 저 눈빛.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확 뽑아 버릴까? 욕을 퍼붓고 싶은데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좀 오래 되었지? 한 20년 되었을까? 정월대보름전야에 말이야. 사고가 있었잖아? 길가에 방치된 나무전봇대.

난 허씨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노인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거야?

네?

자네 말이야. 나무전봇대. 같이 옮겼다며.

거울 속 거인이 된 허씨가 손가락을 세워 나를 지목하며 똑바로 말했다.

너였구나. 그 여자 죽인 범인.

박순경이 허리춤에서 몽둥이를 빼든다. 급히 시선을 돌려 피했는데, 또 다른 거울이 나를 비춘다. 내 뒤로 은행나무가 가로수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은행나무마다 누렁이가 목이 매달려 있다. 박순경이 누렁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누렁이의 얼굴이 내 얼굴로 둔갑했다. 순간, 거울 속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거인도 돌고 난쟁이도 돌고 박순경도 돌았다. 은행나무가 돌고, 아내도 돌고, 나도 돌았다.

여보!

아내가 소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거울 속으로 쓰러진 내가 보인다. 격자 간격으로 끝도 없이 보였다.

허씨와 <나>라는 인물의 아버지 김씨는 서로 친했고 만나면 노름을 즐겼다. 윗마을은 토지가 비옥해 포도농사가 매해 풍년이었다. 하지만 아랫마을은 무슨 이유인지 포도를 포함한 모든 농사가 해마다 흉작이었다. 윗마을 사람들은 한 해 농사가 끝나면 돈이 넘쳤고, 남자들은 술과 노름을 즐겼다.

“만세!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지금 딱 내 말이구먼!”

열심히 땀 흘리고 일해도 항상 궁핍했던 김씨는 아픈 아들 병원비까지 감당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노름을 통해 허씨를 비롯한 윗마을 사람들의 돈을 가져올 때면 만세를 불렀다.

“오늘은 그만하자고?”

“뭔 소리야? 패 돌려.”

그래도 김씨는 못된 마음은 먹지 않았다. 김씨가 윗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도박이라는 못된 마음을 먹은 지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본전이라도 찾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김씨 눈에는 다 돈으로 보였을 것이다. 김씨는 돈을 따면 어김없이 술을 사곤 했는데, 잔뜩 취한 허씨가 한 판 더 하자고 덤비는 것을 보고 아마 그 때 부터 계획을 세운 게 아닐까 추측은 해볼 수가 있겠다. 어쨌든 돈 맛을 안 김씨가 판을 키웠다. 술과 여자를 동원했다. 허씨를 비롯한 윗마을 남자들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를 노려 도박판을 벌렸다. 처음에는 잃어주다가 다시 회수해오는 작업을 반복했다. 노름판의 판돈은 점점 커졌다. 고향을 떠났던 강씨라는 기술자가 합류했다.

“이것이 탄을 쏴서 바꿔치기 하는 것인데, 술 취한 놈들 상대로 조작된 카드까지 사용하면 그냥 게임 끝나는 거야.”

김씨가 수소문을 해서 강씨를 찾아냈고, 사기도박판에 끌어들인 것이다. 양평댁이 꽃뱀으로 나서서 윗마을 사람들을 더 끌어 모았다. 설계자 김씨를 중심으로 아랫동네에 하우스가 탄생했다. 허씨는 초반에 돈을 신나게 땄지만, 점점 가지고 있는 돈을 날려 먹기 시작했다.

“강씨 그 새끼…. 아무리 봐도 수상해.”

허씨를 비롯한 윗마을 사람들이 눈먼 자 들만은 아니었다. 기술자, 즉 타짜 강씨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강씨가 아랫마을에서 잠시 살았을 때 동네 다방아가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강씨가 성폭행하고 죽인 뒤 야산에 묻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이다. 그 때 김씨도 강씨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조사를 여러 번 받았다. 한데, 그것이 또 박순경과 인연이 되었다. 김씨는 사기도박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일부를 박순경에게 상납하고 있었다.

“김사장님아. 나 요즘 너무 힘드네? 강씨 그 양반… 지금 소문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아. 좀 잘 합시다? 그 양반 없으면 하우스가 안돌아 가나? 내가 어디까지 카바쳐야 해?”

김씨도 거액을 만지다가 손님이 줄고 박순경에게 잔소리까지 들으니 강씨가 못마땅해졌다. 김씨와 강씨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평소 술버릇이 좋지 않은 강씨의 행실부터 시작해 계획에도 없는 돌발행동과 약에 빠져 사는 것도 눈에 가시였다. 말 그대로 강씨는 움직이는 시한폭탄이었다. 하지만 타짜 기술만큼은 대체불가였기에 당장 쫒아낼 수도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돈을 쓸어 모으는 자나 잃는 자나 그들의 시간은 비극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허씨는 돈을 잃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아내와 부딪쳤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면 말싸움 끝에 밥상을 집어 던졌고 유리창을 깼다.

“누가 너 같은 놈이랑 살겠냐!”

허씨의 부인은 진절머리가 난다며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허씨의 처제가 곧장 쫒아왔다.

“형부! 도대체 왜 이래요?”

허씨는 처제에게 만큼은 온순하게 굴었다.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 같은 놈 죽어야지 살아 뭐해.”

“형부. 일단 밥 먹자. 일단, 밥 먹고 뭔 말이든 하자.”

허씨의 처제는 결혼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언니 대신 형부와 조카들을 챙겨주다 보니 그만 정이 들고 말았다. 그건 허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는 금량을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처제와 약속한 허씨였다. 하지만 허씨는 또 다시 노름판에 끼어들었다. 김씨가 하우스를 윗마을에 마련한 것이었다. 허씨는 이 판에서 돈을 또 크게 잃었다. 허씨의 처제도 형부는 구제불능이라며 아이들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허씨는 처제결혼식 날에도 술만 마셨다. 인사불성 상태로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겠다는 마음만 키우고 있었다.

욕설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낫을 갈고 있는 허씨 앞에 양평댁이 찾아왔다.

“어이구, 인간아! 처제결혼식인데 그렇게 계속 술만 처먹고 있을 거야? 이러니 강씨 같은 놈이 우습게보고 첫날밤 신부를 자기도 어떻게 해보겠다고 저러는 거 아냐!”

처제의 신랑 될 남자는 양평댁이 주선했다. 김씨랑 강씨, 양평댁과 그 신랑이라는 놈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술에 취하면 과거 동거녀를 상대로 성폭행한 것을 마치, 무용담처럼 여과 없이 지껄여 대던 강씨와도 죽이 맞았다. 강씨와 함께 낄낄 거리던 예비신랑의 얼굴이 떠올랐다. 허씨가 낫을 들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 니 년도 똑같아 이 년아! 너는 뭐 다른 줄 알아?”

양평댁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정신 차리라고 한 말인데 그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허씨는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상태였다.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양평댁을 쫒다가, 그 길로 다시는 넘지 않겠다고 맹세한 금량을 맨발로 넘어 결혼식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허씨는 낫을 든 짐승이 되었다.

눈을 떠보니 접대용 소파 위다.

어렸을 때도 잘 놀다가 픽 쓰러지곤 하더니. 그 꼬맹이 맞네. 단 게 좋을 거야.

허씨 아저씨가 믹스커피를 타서 아내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어머, 이 사람 지금도 가끔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병이었구나. 당신 혹시 간질 그런 거 아냐?

맞다. 나는 측두엽간질 환자다. 하지만 오라가 시작되면 경련이나 발작 보다는 잠시 의식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여름 밀려온 졸음에 깜박 잠이 들고 힘이 빠져 손에 쥔 물건을 떨어뜨리는 정도다. 그럴 때면 환각증세로 환청과 환시를 경험한다. 거울 속 박순경. 노란 단풍 잎. 속삭이는 바람의 소리.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각일까? 갑자기 화가 난다. 환각이든 아니든 지금 꼭 확인할 것이 있다.

근데요, 어르신. 영참 형이 그래요? 내가 자기랑 같이 옮겼다고요?

?

저 노인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커피가 달다.

아닙니다. 신세 많았습니다. 그럼.

아내 손을 붙잡고 도망치듯 거울가게를 빠져 나왔다. 돌아보면 노인네가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아 끝내 돌아보질 않았다. 쯧쯧쯧. 환청일까? 노인네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노인공경이고 뭐고, 돌아서서 얼굴에 대고 퍼붓고 싶다.

그러는 아저씨나 아저씨 아들은 뭐 달라요?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지금 나한테 혀 찬 거요? 아, 좋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 상대로 사기치고 도망친 놈의 자식이나 처제 결혼식장에서 낫 들고 설치는 미친놈의 자식이나 뭐 달라요?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난 끝내 돌아보지 못했다. 정월대보름 전야 오토바이 사고는 낫 부림 사건 후 경찰조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일 것이다. 아버지가 도망친 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 때였으니 내 기억이 확실하다.

저 노인네 치매 맞네. 아무 것도 몰라.

돌아오는 길에 처가에 들렀다. 아내 말에 의하면 장모는 머리를 다쳐 과거의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한데, 아내가 금량초량하며 석조교량을 들먹이자 장모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한다.

아, 금량초량. 맞다. 기억난다. 김서방 고향이 거기였어? 이것도 인연일까? 나 거기에서 잠깐 살았었는데, 사고가 있었어. 오토바이 사고였지. 죽을 뻔 했어.

장모가 머리카락을 왼쪽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흉터를 보여주었다.

30년 전에 파견근무를 했던 곳인데, 정월대보름 전야였어. 난 둥그런 달을 보며 소녀처럼 소원을 빌었지. 하지만 그 때 사고를 당하고 떠나온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되었네. 그 때 나 죽었으면 우리 딸도 세상에 없겠지? 자네도 지금 이 자리에 없을 테고 말이야.

장모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새어 나온다. 장모가 침을 닦고 일어서더니, 사진을 한 장 들고 왔다. 석조교량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장모의 옆모습을 다시 보았다. 왼쪽 귀 뒤로 스무 바늘이 넘게 꿰맨 흉터로 인해 머리카락이 자라나지 않고 있었다. 현장즉사. 잊고 싶었던, 망각한 채로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내 눈앞에 응급차가 도착했고, 의식을 잃은 여자를 태웠다. 서둘러야 한다. 한데, 불빛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가던 응급차가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갑자기 멈춰 섰다. 응급대원들이 차에서 내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전봇대를 치웠다. 영참 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희들은 아래쪽 막아. 우린 위쪽 막을 테니까. 까라면 깔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고요한 밤하늘을 찢어발기던 브레이크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지불놀이처럼, 석조교량 위로 보름달을 따라 한 바퀴 원을 그리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먼저 보았고, 그 다음 쾅!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설치한 쪽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달려 교량 위로 올라갔다. 사람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오토바이를 운전한 남자가 의식이 없는 여자의 머리를 껴안고 이름을 애타게 부르지만, 여자는 대답도 없고 눈을 뜨지도 못했다. 여자는 숨을 쉬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는데, 코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호흡을 방해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나는 멈춰서 있는 응급차를 보면서 친구들에게 강요했다. 현장즉사.

저 여자 이미 죽었어. 응급차가 처음부터 너무 늦게 온 거잖아….

친구들은 그 누구하나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혼자 떠들었다.

저 여자 이미 죽었다니까? 이미 죽은 거잖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린다. 아내가 울고 있는 나를 보았다.

어? 당신 지금 울어? 왜 울어?

아냐. 너무 감사해서. 그런데 있잖아…

나는 다짜고짜 아내에게 도박 빚을 이실직고해버렸다. 다시는 노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뭐? 2억?

아내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장모가 옆에서 횡설수설한다. 또 다시 초점을 잃은 장모의 눈을 본 순간, 나는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깊게 패인 계곡이 있었다. 그곳에는 가치관과 신념을 뒤섞어 버리는 유혹의 흙탕물이 흘렀다. 난 그 흙탕물에 몸을 맡긴 채 살아왔다. 선과 악처럼, 그 갈등의 계곡을 넘게 해주는 다리가 매 순간 존재했지만, 난 오늘에서야 그 다리를 건넌다.

송사장을 찾아갔다. 담배를 꼬나 문 채로 나를 본체 만 체 하는 티파니 앞에 착수금이라고 받은 돈을 그대로 던져주었다.

빵꾸 안 할 겁니다.

송사장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골프채를 붙잡고는 질질 끌고 온다.

카악, 퉤!

티파니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가래를 잔뜩 끓어 올려 재떨이에 내뱉는다.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껌을 질겅질겅 씹는다.

그럼, 돈 갚아.

네. 열심히 일해서 조금씩 갚겠습니다.

얼씨구? 어느 세월에?

진짭니다.

됐고. 그 손, 앞으로.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손바닥이 노란색 은행 나뭇잎처럼 보인다.

뼈를 부숴버리면 당분간은 노름 못하겠지? 아니? 그냥 아예 그 손목을 잘라줄까?

일도 못하겠죠.

송사장이 노려보더니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도록 얻어맞았다. 누렁이처럼 계속 얻어맞았다. 여기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치다가 밖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들어와 또 얻어맞을 것 같았다. 낫을 든 허씨가 떠올랐다. 처제 결혼식을 그렇게 망쳐놓고도 뻔뻔한 인간.

그런 인간도 당당히 산다. 난 벌떡 일어섰다.

아, 씨발! 그만 때려 개새끼야! 일 틀어지면 나한테 다 뒤집어씌울 거면서!

나는 소리친 뒤, 골프채를 빼앗았다. 티파니가 벌떡 일어섰다. 송사장도 깜짝 놀랐나보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더니 골프채를 건네주듯 손에서 놓았다. 나는 무릎으로 샤프트를 부러뜨렸다. 양분된 골프채를 차례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돈 갚는다고! 갚으면 될 거 아냐!

문이 열렸고, 송사장의 부하들이 떼거지로 덤벼들었다. 신나게 때리고, 신나게 맞았다. 아비규환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한 가지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는 적어도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

덤벼! 다 덤벼!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아!

머리에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지불놀이처럼, 눈앞에서 불꽃이 일어나 한 바퀴 돌았다. 자빠졌나보다. 내 의지는 일어서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바닥이 미끄럽다. 버티고 있는 손이 끈적끈적하다. 숨을 쉬고 싶은데, 코에서 피가 자꾸 쏟아져 나온다. 입으로 들어가며 호흡을 방해한다. 보려고 하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고 희미해져간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다. 정말 너무나도 고요하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개차반 인생 뭐가 좋다고.

사랑한다.

문득, 응급차 소리가 들려온다. 나 살 수 있을까?

누구 길 막은 사람 없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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